자연의 인간성과 인간의 인간성
<애프터 양> (2022)
부부는 입양한 아이의 정체성을 존중하기 위해 교육용 안드로이드 '양'을 구입한다. '양'이 기능을 멈춘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놓으라고 드러눕는다. 단지 이번에는 그 대상이 안드로이드일 뿐. 드러누워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아이가 아닌데도 부끄럽다. 아버지는 적당히 떨떠름하게(분명 정중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지금 명백히 떨떠름하다.) 양을 고치러 간다.
아버지가 보이는 묘한 떨떠름함은 영화가 갈등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준다. 작게는 위기에 봉착한 부부 생활, 크게는 기업의 독점과 저항, 세계관에서는 진보와 인간성의 불협화음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갈등은 표면화되지 않는다. 미세하게 느껴진 갈등은 추가적인 사건을 만들지 않고 신기루처럼 관객을 스쳐 지나간다.
영화가 가진 갈등 구조는 익숙한 것이어서 관객은 편하게 이야기를 짜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짜인 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한 그림이 아니다. 기대를 배신당한 관객이 받는 것은 '양'의 기억이다. 안드로이드도 인간보다 덜 유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억은 릴스처럼 남겨져 있다. 근데 그 릴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인간성도 학습 가능한 요소처럼 느껴진다. '양'의 메모리는 자연으로 가득하다. 자연에는 적과 아군이 없어서 싸울 수가 없다. 노자가 말했듯이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만물을 이롭게 하고 싸우지 않는 법이니까.
나비 표본이 매개가 되어 '양'과 아내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양'은 '애벌레의 끝은 나비에게 시작이다'라는 말을 하고, 아내는 인간이 그런 형태의 영원성을 믿도록 프로그래밍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근데 그게 인간에게 이로운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어서 '양'에게 영원성에 대해 물어보는데, 그는 끝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가 있어야 유가 존재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문득 모순이 느껴진다. 나는 지금 '양'의 기억이 가진 아름다움 때문에 인간성을 느끼지만,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인간성은 인간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장자도 우리가 결국 일을 말아먹고 마는 원인이 인간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고 말했으니까. 무와 유를 구분하고,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것도 인간의 기준인가?
분명 인간도 자연인데, 왜 인간은 자연에서 격리됐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질문은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해 보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양'의 기억 속에서 만난 자연은 아름다웠고, '양'의 시선 속에 있던 사람들과 그들과 나눴던 대화에서도 비슷한 결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인간 본연이 가진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