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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Oct 19. 2023

07. Once upon a time

동화의 아름다운 결말처럼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무렵에만 한정판으로 판매하는 바디 로션이 있다. 이름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상큼하고 달달한 풋사과 향을 맡다 보면 여름에 출시하지 않는 이유가 조금쯤 궁금해진다. 그래도 이 향 덕분에 올해의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는 걸 체감한다.


나의 면접날도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내가 불렸던 별명은, 겨울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풋사과’였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오는 12월 말의 어느 아침. 어두운 창밖 하늘은 이른 새벽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차창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고 생기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워낙 양이 방대하고 과목수도 많았기에, 사실 면접 당일까지도 생기부 내용을 완벽하게는 숙지하지 못했다. 1학년 때 배운 과학 과목 내용을 뒤적거리다 보니 잊어버린 개념들이 꽤 많았다. 샤를의 법칙이 뭐였더라? 급하게 인터넷을 두들겨가며 필기를 하다 보니 학교에 도착했다.


베이지색 더블 코트에 일자 슬랙스, 맨 끝까지 단추를 채운 흰색 셔츠와 녹색 브이넥 니트까지. 최대한 모범생처럼 보이기 위해 고심했던 옷차림이었다. 면접관 분들께 잘 보이려면 단정함을 넘어 약간은 촌스럽게 보이는 게 좋다는,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그 말을 나는 충실히 따랐다.


면접 며칠 전에 선물 받은 목도리를 부적처럼 만지작거렸다. 마지막으로 엄마의 응원을 받으며 긴장감을 눌러 담고 웃으며 신호등을 건넜다.


나 다녀올게!

그날 내가 통과해야 했던 것은 면접과 체력 시험, 이렇게 두 가지였다. 전체 지원자 중 절반은 면접을 먼저, 나머지 절반은 체력 시험을 먼저 진행했다. 그 순서는 당일날 공개되었고, 나는 내 바람과는 반대로 후자에 속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향하자 차가운 공기가 볼을 두드렸다. 자신 있었던 윗몸일으키기는 가볍게 통과. 걱정되는 건 오래 달리기였다. 수없이 연습했지만 내 기록은 면접 당일까지도 합격선 전후에서 간당간당했다.


스무 명이 한 트랙 위에서 달리다 보니 재학생 분들이 각자 두세 명씩 담당해서 몇 바퀴를 달렸는지 세어 주셨다. 우리가 색색깔의 조끼를 입자 그에 맞춰 별명을 지어주시는 모양이었다. 빨간색 조끼를 입은 아이들은 한 명에게는 떡볶이, 다른 한 명에게는 빨간 맛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내가 입은 조끼는 쨍한 연두색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잠시 바라보던 선배님은 곧 빙그레 웃으며 경쾌하게 말했다.


풋사과! 친구는 풋사과라고 부를게요.

풋사과 네 바퀴! 풋사과 다섯 바퀴! 조금만 더 힘내요,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귀를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리를 끌다 보니 스무 명 중 열여섯 번째로 1,600m를 완주했다. 당시 우리 조가 상당히 잘 뛰는 편이었는데, 그래서였을까, 나도 덩달아 열심히 달리게 되어 10분 32초라는 인생 최고 기록을 세웠다.


풋사과 친구, 수고했어요. 안 그래도 옅은 홍조가 있는 내 얼굴은 차가운 공기와 몸의 열기 사이에서 사과처럼 붉어졌다. 다정하게 다가와주신 선배님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헉헉거리는 나에게 물을 따라 주셨다.


나도 내년에는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물을 건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 아니까. 지금 이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마음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또 간절한지. 그때 내밀어주는 물 한 컵이 얼마나 다정한 응원이 되는지.


숨을 오래 가다듬을 새도 없이 환복을 위해 다시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 곧이어 마지막 관문인 면접이 이어졌다.


내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다. 대기 시간이 길어 면접 순서가 돌아올 즈음에는 긴장이 다 풀릴 거라 생각했던 것은 큰 착각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세 명의 면접관 앞에 선 순간, 미소를 머금은 입꼬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웃어.

지금 한 번만 더 웃으면, 너는

더 이상 모두에게 웃어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


밝게, 야무지게, 당차게.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들을 되새기며 면접을 이어갔다. 대비를 철저히 했던 덕분인지 질문들은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직접 구상해 본 신소재가 있어요?”


그럼요. 나름의 압박을 가하려 했던 면접관들의 의도를 가볍게 벗어나 나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미술관 도슨트라, 봉사활동이 독특하네요. 여기는 어떻게 갔어요?”


사실 이 질문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했다. 활동을 접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을 잘못 파악한 나는 “부모님께서 태워다 주셨는데요...”라는 바보 같은 답변을 내밀었다. 웃음을 참는 듯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괜찮아, 이 정도는 귀엽게 봐주시겠지.


“중학교 1학년 때 샤를의 법칙을 배웠는데, 실생활 예시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해 볼래요?”


바로 그날 아침에 자동차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옛날 옛적에- 로 시작하는 동화에서 주인공을 위한 말도 안 되는 우연들이 벌어지는 것처럼. 내 유리구두가 지나갈 길을 요정이 미리 곱게 닦아놓은 듯 면접은 순탄하게 이어졌다.


면접이 어땠느냐는 수많은 질문에 단 한 번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부모님께도, 선생님께도, 내 전화를 기다리며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있던 친구에게도 겸손하게 답했다.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사실 나는 내가 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한 편의 화창한 동화 같이 순조롭게 흘러간 날이었으니까. 한때는 그걸 행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내가 모든 상황을 대비하여 준비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많이 노력했기에 다가온 기회를 붙잡을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화의 결말이 대부분 해피엔딩이듯이, 내가 받아 든 글자도 ‘합격’이었다. 모두의 축하와 격려 속에서 맑게 웃으며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의 프롤로그는 새롭게 시작된다.




공부로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모인 곳,

아니, 예술도 운동도 모든 것이 완벽한 아이들이 함께하는 곳.


귀족 학교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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