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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Feb 07. 2024

무엇인가를 기다리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2024. 1. 30)

  "엄마 이번에 서울 오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좀 보고 싶어."

  "뭘 기다린다고? 무슨 연극인데?"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야. 엄마도 잘 몰라. 신구선생님이 몸이 안 좋으신데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연극이라고 해서 보고 싶어."

  "그럼 봐야지!"



  이렇듯... 무슨 연극인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신구 선생님이랑 박근형 선생님이 나온다는 이유로 덜컥 예매부터 하고 보니, 너무 어렵고 난해한 연극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연극은 사뮈엘 베케트라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아일랜드 출신 작가의 극본을 연극화한 것으로, 알고 보니 이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저명한 작가였으며,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은 연극계에서는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유명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나름 문화생활과 독서 등에 관심이 있어온 나는, 책이 원작이 된 영화, 연극 등을 볼 때는 무조건 책부터 읽고 영상물을 보는 습관이 있다. 약간은 집착적일 정도여서, 이번에도 없는 시간에도 꾸역꾸역 책을 읽고 가야겠다는 고집을 부리며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당최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횡설수설하고 기이한 행동을 반복하는 등장인물 4명은 모두 이성적으로 이해가 불가한 캐릭터들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노쇠하고 지친 자들이다. 신발 하나 제대로 벗고 신기 어려워하며 늘 배고프고 지루하고 힘들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딱 하나. 고도. 고도씨가 오기로 한 그날을 기다리며 어제가 어제였는지 며칠이 지난날이었는지 시간관념조차 상실한 채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루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며 그 시간을 버텨내고 있는 그들은 고도씨만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도 고도는 오지 않고, 아마 그 후로 오랫동안 고도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고도는 죽음일까? 아니면 삶일까? 아니면 누구에게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기다림?

책에서 보았던 횡설수설에 가까운 이해할 수 없는 대사들과 인물들의 이상한 행동들은 모두 기다림의 과정에서 끔찍이도 길고도 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고행의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베케트는 이 희곡에 대한 어떠한 부연설명도 거부하였다고 한다.

설명이 없어도 연극을 보고 난 후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는) 기다리고 있구나.

삶이 지속되기를. 또는 삶이 끝나기를.




그들은 이렇게 살바에 목을 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가 않다.

연극 무대 위에는 목매 죽기에도 시원찮을 비실비실한 고목 한그루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횡설수설하고 아프고 졸리고 두드려 맞고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살아내야만 하는 것.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는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삶을 살아낸다.

그들에겐 둘 뿐이다. 신발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두드려 맞은 곳을 살펴봐 줄 사람도, 지나가는 방랑자 럭키와 포조에 대한 기억을 나눌 사람도 둘 뿐이다. 기억이 시원치 않고 언제 적 일인지도 모호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목을 매어 죽을 궁리도 함께이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도 기대어 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신구선생님과 박근형선생님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열연하셨고,

그 어릿광대 같은 부랑자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잔하고 불쌍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을 오롯이 표현하셨다.

럭키 역할로 나오신 박정자 선생님까지 세분의 평균연령은 거의 85세이다.

신구선생님은 거의 아흔이신데 2시간 내내 이어지는 모든 대사를 소화하시고 연기에 몰입하시는 모습이 정말 눈물 나게 멋졌다. 신구 선생님께서 지금 기다리고 계시는 고도는 무엇일까. 다음 작품? 건강? 편안한 삶?


  연극이 끝나고 엄마랑 나는 신구선생님의 더욱 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나는 뻑하면

 "하아~ 고도를 기다리며 사는구나~"라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독백을 중얼거리는 괴벽이 생겼다.




"이제 그만 가자"

"가면 안 되지"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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