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에 대하여
요즘 일상 중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많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밥을 먹다가, 손을 씻다가, 냉장고 문을 열다가도, 어떤 동작을 취하는 찰나에 그것과는 전혀 관련 없는 뜬금없는 말들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어렴풋한 생각보다는 더 구체적이다. 근래에 생각이라는 것을 너무 많이 해서 생각 포화 상태가 되어 생각에 지배가 된 것만 같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로 뻗어나가는 때가 있다. 끝으로 갈수록 복잡하고 희미하다. 그런 생각의 형태를 묘사하자면 뚜렷한 선이 아닌 점선으로 그려진 그림 같다. 형상은 있지만 뚜렷하지는 않은. 그런데 요즘 떠오르는 그것들은 뚜렷한 선으로 그려진 그림 마냥 깔끔하고 마침표까지 또렷이 찍힌 문장의 형태를 띤다. 한 문장, 또는 한 문장으로 시작해 한 문단이 되기도 하고,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 생각이나 감정이 각 단어가 적재적소에 배치된 깔끔한 문장의 형태로 떠오르는 것은 묘한 기쁨과 희열 그런 류의 감정을 가져다준다. 그 기분을 보다 더 명쾌하게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튼, 그것들을 허공에 날려 버리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싶어 몇 번 정도 곱씹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창밖을 바라보다, 밥을 먹다, 손을 씻다, 냉장고 문을 열다, 예고편도 없이 밀려들어온 그것들을 내 머릿속에 꽉 붙들어 두는 것은 항상 실패로 끝났다.
몇 번 곱씹는 행위로 그것이 단기 기억으로서 휘발되지 않고, 뉴런에서 시냅스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었다가 시간이 지나고 다시 떠올렸을 때 재차 기억나길 기대하는 나의 시나리오가 무색하게도 이미 허공에 흩어져 버린 그것들은 떠오르기는커녕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기억을 되짚어 보려 애쓰지만 허공에 손짓하듯 아무것도 짚어지지가 않아 내 기억장치의 능력치를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시간, 공간, 상황에 대한 출처를 갖고 있는 ‘일화 기억’과 달리, 정보를 획득한 시간적, 공간적 맥락과는 무관한 ‘의미 기억’의 경우, 뭔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일부러 생각을 해내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거나 깜빡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객관적인 정보에 의거한 합리화의 과정을 거치고 난 후로는 인간 능력의 한계로 받아들여 굳이 나라는 개별적인 개체에서 이유를 찾으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장기 기억이 기억을 꺼내는 행위에서 많이 생성된다고도 하는데, (쉽게 예를 들면, 배운 지 얼마 안 돼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던 것을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결국 "아! 맞다. 그거!" 하고 그 정보를 떠올리는 데 성공하고 나면 그 뒤로는 애쓰지 않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얄팍한 기억력은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던 것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나에게 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
내 기억장치의 물리적 한계를 일찍이 받아들이고 그 외의 수단으로 머리가 아닌 손을 써서 바로바로 기록이라도 해 두었더라면, 소중한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허공에 흘려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나의 자양분을 놓친 듯 느껴져 아깝고 아쉬웠다. 그래서 이제는 때가 지나면 사라져 버릴 순간의 것들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기로 다짐했다. 순간이 모여 내가 되니까,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 있는 무언가 떠오를 때면 시간이 지나도, 애쓰지 않고도, 꺼내어 볼 수 있도록.
귀찮지만 행하는 작은 노력들이 반복되면 습관이 될 것이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체화시킨 습관적 행동들이 모이면 나에게 긍정적인 결실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다. 어느 날 문득 스치듯 떠오르는 말을 흘려보내는 대신 기록해 두었더니 이렇게 긴 글 한 편이 완성되었다. 내가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기로 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