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거나 차단하거나 혹은..
너: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났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어. 나는 고여있고 친구는 흐르는 느낌.. 뭔지 알아?
나: 그 느낌 너무너무 알지. 기분 별로였겠다.
너: 그동안도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그때는 질투, 자격지심, 내가 작아지는 느낌 머 그런 부정적인 감정변화였거든. 내가 그런 걸 커지게 두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금세 털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왔지. 근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야.
나: 너무 궁금해. 얘기해 줘.
너: 이제 나도 흘러야겠다고 퍼뜩 생각이 들었달까? 뭐 어디로 갈지 어떻게 할지 그런 건 모르겠는데 갑자기 강한 동기부여가 됐어.
나: 재밌다, 자극이 달랐던 걸까, 지금의 네가 어떤 마무리 단계(?)에 있는 걸까? 모든 종말은 필연적으로 시작을 가져온다잖아?
너: 이 상황에 가져다 써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렇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것들을 조금 더 거침없이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 그래,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자기 주도형 인간 중 하나거든. 이제 때가 되었다.
너: 진짜 때라는 게 있나 봐.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하던 일에서 내가 자발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움츠리고 있었더라고. 드러나고 싶으면서도 드러나고 싶지 않은 거 그런 거 아니?
나: 무대공포를 지녔지만 굳이 꼭 뭔가를 할 생각을 하는 나에게 그런 심리는 일상이지. 결국 드러나지 않는 선택만 하지만 말이야.
너: 근데.. 자꾸 주위를 탓했지. 내가 작아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지 아이 때문에, 상황 때문에, 남편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불쑥불쑥 미워하게 되더라고.
나: 나 때문에, 여도 답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답 없는 원인을 여기저기 갖다 붙이게 되지. 미워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고.
너: 인간이란.. 암튼 너무 오랜만에 친구의 모습이 설렘으로 다가왔어.
나: 그 친구가 그냥 자기 상황을 공유하는 데 그친 게 아니라, 그 얘기를 하는 그 친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난 그 느낌이 참 크게 다가오더라고.
너: 이래저래 맞아떨어진 거 같기도 해. 나 역시 그 친구가 얘기하는 모습을 좋은 자극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됐나 봄. 그동안 ‘움츠린 나’가 더 편했는데 이제는 그걸 피곤하게 그동안 왜 그러고 있었지 머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
나: 나의 오랜 질문 중 하나가 지금 네 상황에 맞아떨어져. 그동안 ‘왜 (가깝고 친하다고 칭하는) 우리는 서로를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너: 그래. 네가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나를 보니 진짜로 이게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 내 주위에 그런 친구가 있다 없다도 중요하지만 그냥 내가 변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역시 중요하고 타이밍도 그렇고. 그리고.. 네 말대로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게 중요한 거 같아. 그건 절대 억지로 할 수 없는 거니까.
나: 요즘 자꾸 차원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져 있는 선형 시간을 사는 게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거 같아. 나의 과거가 지금 현재의 기반이 되고, 그게 미래를 결정한다는 그런 생각. 인과관계에서 인이 과거에, 과가 미래에 있다는 생각.
너: 부피라는 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나: 우연? 긍부정을 떠나서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과거의 경험과 온전히 단절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했던 게 아니면 너무 겁나는데 했던 건 또 별로야, 근데 할 줄 아는 건 그거밖에 없어, 그러니까 미래도 안 보여. 이렇게만 살고 있는 거 같거든.
너: 그러네. 선형으로 생각하면 뻔한 미래만 보이는구나. 우연이 달라붙게 나부터 열린 태도를 가져야겠어.
나: 진짜로. 전에 우연과 상상 영화를 보면서도 하던 생각인데.. 우연을 차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거든. 너는 정말 운 좋게도 친구로부터 좋은 우연을 경험하게 됐네.
너: 우리가 서로의 좋은 우연이 되길. 나 너뿐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