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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Aug 12. 2024

언제나 현재를 이기고야 마는 허상

아니, 허상에 지고야 마는 현재인가

‘잘 잔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잘 못 잔다며 실망하는 게 영 이상하다’는 글을 쓰고 나서 이것저것 들여다보니, 제가 했던 말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이데아가 이상향의 어떤 것을 향해 닮아가려 애쓰는 현실에 대한 얘기였던 게 기억이 났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찾아봤어요.)


이데아는 현실에는 없지만 어떤 이상적인 것을 구체화한 거라고 합니다. 아, ‘이상적’이라는 게 대단한 걸 말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텐데요, 당장 눈, 귀, 팔, 다리 각각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털은 거의 없고 살색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직립보행을 한 이미지떠오릅니다. 누군가는 훨씬 더 많은 성격을 추가할 수도 있고 주입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이데아는 얼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 이미지와 정말 똑같은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아마도 없을 거예요. 우리는 적당한 범위 안에 비슷한 것들을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각자의 이상적인 모습에 벗어나는 사람을 마주하거나, 생각해 본 적 없는 다른 조건의 사람을 처음 만나면 당황합니다. 반대로 제가 나열한 이상적인 모습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좀비를 만나는 건 어떤가요? 저는 아마 인간이 아니라고 금방 결론을 내고(이렇게 쉽게 바뀌는 이상이라니) 공격하려고 할 것 같은데요, 좀비가 된 친구를 만난다면, 좀비가 된 가족을 만난다면 그건 또 어떨까요? 점점 복잡해집니다. 각자의 구체적인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합의한 이데아는 여기에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조금 더 존경받는 위치의 누군가(종교랄까요)가 말하는 이데아에 힘이 실리긴 하지만, 모두가 상상하는 이상은 각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다양하게 불행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가치판단을 합니다. 그중 하나는 이상에 가까운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건 더 선하다고, 더 선하면 믿을 수 있다고, 어떤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권위를 부여합니다. 인플루언서들의 과장된 이상성이 권력이 되고 부가 되는 것도, 공부를 잘하던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상과 거리가 먼, 즉 못생기거나 공부를 못하던 사람이 받는 취급에 대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게다가 자신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이상이라는 것은 차별을 만들어내고 크나큰 권력으로 작용하며 사회를 통제합니다.


다들 이상에 집중할 때, 오히려 현실을 얘기한 학자가 있었다고 해요. 어차피 이상에 가깝지 않은 현실에 산다면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더 닮은 점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상과 닮지 않은 차이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였대요. 이 관점의 전환이 대단한 건, 이상이라는 하나의 허상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클래스와 기준을 세우고 우열을 나누게 되는데, 차이에 집중하는 건 비교할 수가 없다는 거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우리는 ‘누가 더 멋지게 개성적인가’에 집착합니다. 더 개성적이라는 말도, 멋지게 개성적이라는 말도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질서가 아닌 카오스가 지배하기 때문에 세상은 원래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의 고민이 허상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습니다. 작게는 제 잠에 대한 고민이 그럴 거고, 관계, 미래 등 더 큰 고민들도 ‘지금을 부정‘하며 ‘더 나은 어떤 것’이 있다는 가정 속에서 성립하니까요.


여전히 어렵습니다.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고, 지금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게 뭔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살라는 말일까요. 이상을 향한다는 내 삶이 지금 여기 있지 않고 미래 어딘가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 같고, 현재, 바로 지금의 나만이 수시로 변하며 이상과 닮지 않은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건가 싶습니다.


본래의 자기를 찾으라던 사람도, 본래의 자기가 지금의 자기보다 더 멋지다거나 더 낫다는 가치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했다고 합니다. 혹은 본래의 자기로 살아가는 타인이 나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이죠. 본래라는 방향성을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지 본래라는 (닿을 수 없는) 어떤 상태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말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할 모델을 고민하는 건 필요하지만 그것에 도착한 상태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거 같아요. 미래를 지향하지만 그 미래를 향하는 현재의 나를 바라보고 미래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미래 현재의 무게중심을 넘겨주지 말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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