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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비 Oct 02. 2022

자네 머리 깎아볼 생각 있는가

DAY8 - 태백산 유일사의 인연

태백에 온 지 이틀이 지났다. 

태백에 오기 직전 너무 아름다운 곳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와서일까. 태백은 첫날부터 환상이 산산이 무너진 곳이다. 폐광촌의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실수이기도 하다. 

사방을 둘러싼 초록을 상상했지만 그 초록의 색은 검었고, 덤프트럭이 쉬지 않고 자재를 나르고, 시내는 서울 퇴근길 마냥 차가 막힌다. 이 넓은 땅덩어리를 조금도 효율적으로 쓰지 않겠다는 듯이 주차 문제만 해도 심각해 진이 다 빠졌다. 

도착하자마자 떠날 궁리를 한 것 같다. 

태백이 더 싫어지기 전에 생각을 멈추려고 반나절을 카페에서 보냈다. 그 와중에 발견한 태백의 첫 장점이 밤 10시까지 운영하는 카페라니. 도시의 맛은 역시 웃기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무작정 태백산으로 향했다. 

여행 계획 짜는 것도 머리 아프고 잡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생각을 멈추기에는 걷는 것 만큼 좋은 것이 없지. 그것도 해발 700미터에서 시작하는 오르막길 산행이라면 더욱.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드라이브 길이 멋져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내가 올라간 루트는 유일사 코스로 언덕길을 한시간 걸으면 유일사라는 사찰에 닿는다. 

그 곳에는 진도 두 마리가 있는데 두 마리 모두 사람들을 경계해 엄청 짖는다. 일단 보면 짖는다. 내게도 예외는 없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일단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강형욱 보듬 컴퍼니의 오랜 구독자 아닌가. 

일단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계단에 납작 걸터 앉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 내밀기 스킬 시전. 

다행히도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인지 잠깐 경계하고는 다가와 열심히 냄새 맡았다. 특히나 땀으로 흠뻑 젖은 가방줄을 오랫동안 킁킁댔다. 너는 합격이다-라는 뜻인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합격한 기념으로 법당 앞 돌계단에 앉아 오랫동안 쓰다듬어주었다. 

(좌) 반야  (우)금강


부처님께 인사하러 들어가니 비구니 스님이 기도 중이셨다. 

살짝 눈치 보면서 끄트머리에 앉아 함께 기도했다. 본체도 안 하시던 스님은 기도가 끝나자 나를 보면서 기특하다고 했다. 갑자기 밖에서 본 강아지가 된 것 마냥 있지도 않은 꼬리를 흔든다. 약간의 부끄러움과 함께 더 칭찬해주세요-하는 마음으로. 

계단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건지 뭘 하고 싶은지 그런것들 말이다. 중간 중간 강아지들도 내 냄새 맡고 핥기를 멈추지 않은 건 보너스. 


배고플테니 밥이나 먹고 가라며 요사채로 초대하셨다. 식탁은 따로 앉겠다 하여 의아했지만 직접 요리한 나물과 장아찌들이 정말 맛있어 잘 먹었다. 웬만한 스님들은 모두 요리사 뺨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음식점에서 사 먹는 한정식보다 정갈하고 깔끔하다. 


맛있게 얻어 먹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믹스커피를 타 주셨다. 스님들보다 믹스커피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며 약간의 농담도 섞어 살갑게 얘기하시는 걸 보니 내가 조금은 편해진 모양이다. 커피는 같은 테이블에서 마셨다. 

한참 스님 인생 얘기 듣고 있는데 갑자기 물어보셨다. 남자친구 있어요? 결혼은 했어요? 

또 잔소리 시작인가 싶어 긴장하고는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씨익 웃으며 다행이네- 머리 깎을 생각은 없어요? 한다. 

글자 그대로 삭발은 언젠가 해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출가라니. 당황한 나는 왜요..?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어울려서요. 출가하면 잘 할 것 같아. 당신 속명도 이미 법명이던데.”


별 의미 없이 한 말일 수 있겠지만 내 마음만은 요동쳤다. 당황해서? 아니 떨려서. 

출가한 내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떨려서. 차들도 올라올 수 없는 이 사찰에서 그것도 비구니 스님들만 기거하는 유일사에서 백구들과 함께할 모습이라니. 상상만해도 좋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 드리고 불경을 외워 시험보고 육식을 포기하는 것도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핑크빛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내가 상상하는 핑크빛 미래가 출가라니…나중에 생각하고는 좀 웃겼다) 



홍인스님은 언제든 머리 깎을 마음이 생기면 오라고 하셨다. 

출가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연이 필요한 법인데 그 인연이 오늘 생긴 것이라면서. 

내가 스님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머리 깎을 일이 없어도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인연이 생겼다는 것. 오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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