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3 강릉
새벽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멍 때렸다.
바닥을 보이는 찻잔을 보고는 잔잔하고 편안했던 기분이 불안해졌다. 요즘 들어 사소한 것에도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왜 이 여행을 왔을까.
그래 강원도가 궁금했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내 삶의 터전으로 삼아 볼까 싶어 답사하는 기분으로 둘러본 것도 있다.
그런데 나도 참 웃기다.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이후 강원도도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서귀포에는 흔치 않은 드넓은 해수욕장, 저녁 늦게까지 운영하는 분위기 좋은 카페, 맛있고 저렴한 음식들, 높은 산과 멋진 풍경들이 있지만 내가 이 곳에 어울리는 사람 같지가 않다. 나는 어디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어딘가에 어울릴 수는 있는 사람일까.
사람들과의 단절은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시킨다. 병적으로 내 스스로 고립시킨다. 외로워질 때쯤 더 깊숙이 도망가고, 슬퍼지면 더 깊숙이 숨는다. 감정의 유입을 차단시키고 싶은 것 마냥 입과 귀를 닫는다. 생각을 멈추고는 언젠가 썩어 냄새가 날 깊은 곳에 묻어둔다. 사람들이 궁금하다가도 지독하게 모른 척 하고 싶다. 진저리치게 알고 싶지 않고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을 피해 다시 혼자가 된다.
나 자신과의 연결고리도 약해지는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모두 흐려지는 기분은 새벽 내내 켜졌다 꺼졌다 반복하는 센서등 마냥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나라는 사람이 선명히 빛나다가 윤곽도 없이 희미해지는 이유는 뭘까.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안개는 사라지지 않는구나. 숲 속을 걷다가 죽고 싶어졌다. 딱 이 정도의 기쁨과 슬픔을 간직한 채 서서히 아니 빠르게 사라지고 싶다.
소훈이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뿌리 내리지 못하고 중력 없이 떠도는 사람. 그게 나의 모습이 될까봐 무섭다. 문득문득 잠에서 깨어날 만큼 무섭다. 너는 내 모습을 빗대어 그런 얘기를 한거니.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저만의 터를 만들어 뚝딱뚝딱 집을 짓는 것 같다. 그 모습이 예쁘건 못나건 그들은 자신만의 집이 있다. 나는 내 터전을 만들지 못한 채 방황하고.
어디에서부터 잘못 된 걸까? 나를 짓누르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고 싶다. 넌 언제부터 이 곳에 살았니. 얼마나 오랫동안 숨어 있을거니. 언제쯤 내게서 떠나갈거니. 언제쯤 나를 집어 삼킬거니.
그런 사람이 있었지- 라는 까마득한 과거로 남아 누구의 마음에도 새겨지지 않은 채 사라지고 싶다.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환상을 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