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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Oct 21. 2023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그냥 행복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것, 오후의 햇빛의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놓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그렇게 정의한다. 일상 중에서 누릴 수 있는, 별일은 아니지만, 확실하고 또 충분하게 거머쥘 수 있는 행복.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은 그가 창조한 새로운 단어에 한편 위안을 받았다.


생각을 보다 명확히 정리하기 위해선, 그 반대말을 찾는 것이 좋다. '소소한, 작은'은 '커다란'과 대치는 단어이고, '확실한'은 '불확실한'과 대치된다. 그러니까 소확행은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커다란 행복을 좇던 청년들이, 몇 번의 좌절과 체념을 겪은 뒤 만들어 낸 도피처로 볼 수 있다. 그나마 이런 행복이라도 곁에 있으니, 인생은 살아갈만한 것이라 여길 수 있게 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뭐라도 해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작더라도 확실한 행복을 챙기고 싶다는 마음엔 백번 이해가 간다. '이해한다'라고 표현하기엔 내 마음이 수동적으로 끌려간다. 어쩔 도리 없이, '이해가 간다'는 게 더 적절하겠다. 다른 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해'가 내 손을 떠나가버린 것처럼 그렇게, 소확행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유행어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시대의 분위기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소확행은 우리의 딜레마를 잘 표현하는 유행어이다. 물론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체념의 정서로 젖어들게 하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위안은 받고 싶지만, 체념에 젖어들고 싶지는 않은 나에겐 쉽사리 쓰기엔 꺼림칙한 단어이다.


아침에 창을 여니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달려 있었다. 잠기운을 가시게 하는 찬바람이 불어 들어왔고, 잎의 초록과 감의 주황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반려묘와 함께 창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행복이었다.


인정할 순 없지만, 의미상 소확행과 반대편에 위치한 커다란 행복들. 내가 얻어낸 능력주의적 성취들. 물론 긴 노력 끝에 다행히 성과를 마주할 수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행복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행복도 쉽게 포기하긴 어렵다. 무엇이 더 큰 행복이냐 물으면 비교 불가라고 답할 수밖엔 없다. 둘은 분명히 다른 감각의 행복이다.


'커다랗지만 불확실한 행복',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두 단어를 정의할 수 있는 기저에는 목적지향적 행복론이 있다. 기나 긴 길 끝에 놓인 행복을 위해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쉽게 포기해 왔다. 그것이 소소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커다란 해복의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자, 앞서 말했듯 이것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는 마음에서 소소한 행복으로 눈을 돌렸다.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두고 나면, 행복의 크기를 가늠하고 무게를 저울질하게 된다. 비교는 삶의 가치를 오해하게 한다. 행복해야만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불행한 삶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별다른 선택권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행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살아가다 특정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일 뿐, 성취해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대신, 담백하게 "행복하다" 말하는 게 어떨까. 오히려 그 행복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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