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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Jul 10. 2024

능력주의적 지적에 대한 능력주의적 반박

이센스앨범 <저금통>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적나라한 돈 얘기다. 그의 가사에서 나는 잘 숨겨두고 싶었던 나의 찌질함을 발견한다.

"이센스 그래서 박재범 보다 잘 범? 이 새* 그러는 넌 나보다 잘 범?" <저금통>


이센스와 박재범은 소위 말하는 '국힙원탑' 타이틀을 두고 자웅을 겨루는 아티스트다. 모 힙합 커뮤니티에서 둘을 두고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다. 누가 한국 힙합 최고의 아티스트인지를 두고 말이다. 최고의 힙합 아티스트를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음악성과 대중성, 개인적인 스타일, 나아가서는 사람됨됨이까지. 다양한 기준을 두고 싸우던 전쟁터에서 싸움을 단번에 종결해 버린 사람이 등장한다. 


"이센스 그래서 박재범보다 잘 범?"


이센스는 다른 말보다도 해당 댓글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돈이라는 기준은 한 사람의 다층적인 특징을 납작하게 뭉개버린다. "누군 능력도 참 좋아"라는 말에서 능력은 곧 돈을 벌어들이는 수완이다. 그래서 이센스가 박재범보다 능력이 좋냐는 말이다. 그렇지 못한 이센스는 일종의 가불기 같은 질문에 요즘말로 긁혀버리고 만다. 


한 인간의 삶에는 수많은 선택들이 있다. 선택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언젠가는 합리적이었을 수도 또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선택과 이유는 그것의 당위를 따지지 않고 한데 뒤엉겨 한 사람을 이룬다. 돈이라는 기준은 단 칼에 뒤엉킨 삶을 동강내버린다. 그의 서사, 음악성, 스타일은 이유를 잃고 무용해진다. 그 앞에서 좌절하지 않을 사람, 이성을 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의 반응은 그래서 이해할만하다.


"이 새* 그러는 넌 나보다 잘 범?"


그는 자신을 분노에 차게 한 능력주의적 논리에 근거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자에게 되묻는다. 너는 그런 질문을 할만한 자격이 되느냐고. 능력주의적 지적에 대한 능력주의적 반박이다. 그의 분노는 공감할만하지만, 능력주의의 악순환이 견고해지는 모습을 목도한 나의 마음은 처량하다. 거칠게 짐작하자면, 그의 말마따나 댓글을 단 이는 높은 확률로 박재범은 물론 이센스보다도 가난할 것이다. 가난한 자(댓글러)는 덜 가난한 자(이센스)를 조롱하고, 덜 가난한 자(이센스)는 발끈하며, 부자(박재범)는 말이 없다. 능력주의는 자급자족이다. 음모론 속에 등장하는 절대 권력을 지닌 누군가가 퍼뜨리는 전염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규율 안에서 고통받는 우리는 능력주의의 규율을 재생산하고 다시 타인에게 규율을 강제한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나는 명절 풍경을 떠올린다. 나의 숙적 A 씨는 현재는 퇴직했지만 지방에 위치한 대기업 지사 임원 출신이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나는 능력주의적 성공의 가능성이 다분한 소년으로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를 비롯한 가족의 바람대로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소위 인서울 명문으로 취급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학에 진학 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의 것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바람처럼 안정적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삶의 방식은, 내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대기업 공채 시험에 지원하는 것은 내 선택지에 없었다. 좋은 글로써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그것으로 내 몫의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꿈이 무어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그리 대답했다. 그는 비웃었다. 그 해 명절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냐 물었고, 다음 해 명절엔 집안에 법조인 하나 있으면 좋겠단 바람을 내비쳤고, 그다음 해 명절엔 의사가 돼 보는 건 어떻냐 내게 물었다. 나는 그의 조언을 받드는 대신 내 나름의 답대로 성장했다. 이제 그의 안중에 나는 없다. 그는 이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지만, 여전히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특히 청년들에게 능력주의적 조언을 건넨다. 대기업에 수십 번 지원하여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결국엔 성공한 옆집 아무개의 사례를 들먹이며, 환경은 바뀌지 않는다고 치열하게 노력해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개 씨의 의지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아무개 씨의 이야기로 다시금 능력주의 규율을 퍼뜨리는 A 씨는 용서하기가 어렵다. 다른 어른들은 A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나는 소심하게 "좋아하는 일하면서 만족하고 살면 그걸로 된 거지 뭐"라고 말해보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어른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더 슬픈 건, 이센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실 내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은 대개 능력주의적 반박이라는 사실이다. 


"당신들이 공부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갈 수 있겠냐"라며 그나마 내가 가진 능력주의적 성취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붙들어 본다. "서울에서 단 5년이라도 살아본 적이 있냐며,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시기에 별 능력도 없으면서 콩고물 주워 먹은 게 뭐 그리 자랑거리냐"라며 당신과 나의 구분하려 애쓴다. 내뱉는 순간 나는 능력주의 규율의 생산자가 되어 버릴 걸 안다. 그렇기에 간신히 말을 삼킨다.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만큼 최악이 되어버린 기분과 함께.


돈 보다 중요한 거? 몇 가지 있어. 근데 벌고 나서 말해야 겨우 내 말 믿어. so, get money. 더 또 더 또 비교는 니몫, 난 내 거 한 번 더. <줘>


그는 알고 있었다. 돈 보다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을 말하길 허락해주지 않는 사회도 있었다. 이센스는 능력주의적 성공을 통해 그 몇 가지를 말할 자격을 갖추기로 다짐한다. 이센스는 그러한 능력주의가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말할 자격을 심사한다는 사실을 긍정하진 않지만 인정하는 모양이다. 이는 순응도 저항도 아니다. 사회의 <이방인>이었던 그는 <저금통>을 들고 내부인 자격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다. 순응도 저항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자신의 욕망과 사회의 억압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공감할 있지만 두고 보기엔 마음이 편치 못하다.


어쩌면 한 인간은 타인의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무능력하다. 사람은 저마다의 세계에서 저마다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간다. 타인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 그 누군가의 능력은 마치 초능력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것은 내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게 없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센스가 박재범이 될 수 없듯 박재범도 이센스가 될 수 없다. 둘은 음악도, 스타일도, 성격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차이, 타인의 고유함 그 자체이다. 이는 돈이라는 기준을 두고 비교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고서야 이 지당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건 얼마나 모순적인가.


타인의 세상은 경이로워야 한다. 타인의 세상을 경이롭게 느끼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고유함을 잃는다. 돈이라는 기준을 두고 자신의 우월성을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타인보다 더 돈벌이에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부터 존재 의의를 찾아야 하는 운명이다. 그 운명은 언제나 그렇듯 나를 향해 손을 흔들지만 나는 애써 외면해보려고 한다. 부단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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