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은 언어가 사람의 마음을 적확하게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단어다. 누군가를 두고 쉬이 '진정성이 있다/없다'라고 판단하지만, 타인의 진정성이 실제로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 더 구체적으로는 생김새, 호흡, 분위기, 단어, 냄새, 목소리 등등에서 비롯된 진정성 비슷한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뿐, 실제 타인의 진의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유추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가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신의 눈을 갖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타인의 진정성이란 절대로 거머쥘 수 없는 대상이다.
그 문제의 '진정성'을 마음이라는 단어로 대신하자면, 인간의 행동은 마음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최근의 여객기 참사를 비롯하여 세월호, 이태원, 오송 등 수많은 사회적 참사를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지만 그 기저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애도한다'라는 말이 갖는 무게는 우리로 하여금 그만큼의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은 그 말보다 클 수도 또 누군가의 마음은 그 말보다 작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큰 문제인가? 인간은 수많은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간다. 페르소나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유용한 도구이다. 완벽한 개별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깊은 내면이 요구하는 바를 마음껏 실현하며 즉각적으로 욕구를 해소할 수 있겠으나,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오히려 그 자아의 추동을 억제하는 것이며 기꺼이 타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관계, 공동체, 사회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페르소나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페르소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성격을 띠는 행위다.
누군가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특별히 저 죽음만을 애도하는 것은 위선적이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맞다. 특별한 죽음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감각할 수 없다는 사실도 때론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죽음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건 기꺼이 애도한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위선을 묻기 전에 타인의 진정성을 재단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스스로의 오만을 먼저 점검해보아야 한다.
또 누군가는 "애도(슬픔)를 강요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애도를 말하고, 누군가는 깊이 슬프진 않지만 애도라는 말을 꺼낸다. 그들의 진정성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적어도 좀 더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다. 기꺼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페르소나를 뒤집어쓰는 사람들이다. 나아가서 먹고사는 문제가 목을 죄어 슬퍼할 겨를도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더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지 못하지만 인간적으로 이해할만하다. 그런데 진정성도 없으면서 굳이 타인의 애도까지 문제 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행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분명한 해를 끼친다.
인간다움이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성선설 성악설 따위와 같은 인간의 진의를 단정 지으려는 시도는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할뿐더러 오만하다. 인간다움이란 그가 속한 사회에서 널리 합의된 선과 악, 그 사이에서 흔들리며 고민하고 선택하는 모습 그 자체이다. 속으론 꽤나 냉소적이고 악한 마음이 드는가. 그건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굳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진정성까지 지레 짐작하고 애써 끌어내리려는 심보는 다른 문제다.
애도의 진의를 가리지 말길 바란다. 인간다운 노력을 폄훼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런 당신들의 행동이 부디 인간다움을 향한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길, 그리고 언젠가 좋은 계기로 성찰할 수 있길 바란다.
2025.1.1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