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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Dec 23. 2023

여행을 고려하는 서로 다른 자세

제시된 금액은 260만원

터가 안 좋은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서 뻥뻥 터지는 유치원 일을 수습하다 보니 악몽과 같은 12월이 지나려 한다. 어느새 고개를 들어보니 방학식이 코앞.

뭐가 억울한지는 모르겠는데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여행 가자."

"그래? 그러자."


웬일이지. 보통 내가 어디 가자고 하면 남편은 '거길 왜 가냐', '집 떠나면 고생이다', '갔다 와서 괜히 돈 썼다고 후회할 거면' 등등의 말을 하곤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쨌든 바로 나온 긍정의 말 덕분에 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치? 오빠도 이쯤 되면 여행 가고 싶어지지. 그게 정상이지. 그럼 어디를 가야 하나~ 가까운 온천도 좋은데, 뭔가 비행기를 타고 싶은 기분이다. 안 그래?"

"그래"

"그치~? 어차피 오빠도 일하는데 전화 오는 거 받기 싫을 거 아냐, 그럼 역시 해외로 가는 게 좋겠지? 요즘 뿌꾸옥이라는 데도 괜찮다고 하더라고. 아님 비가 오거나 말거나 발리를 가봐!!?"

"너 원하는 곳으로 해. 난 어디든 괜찮아. 해외여행도 좋고."

"오오오올~~~ 뭐야뭐야. 아, 근데 발리는 좀 멀긴 하다. 비행시간이 길어서 애기가 힘들어할 거 같아. 그럼... 태국? 푸켓도 좋지. 성수기에 한 번 질러봐!!!???"

"그래, 한 번 가고 싶은 곳으로 알아봐. 260만원 안에서."

"... 응?"

"우리 여행비로 모인 돈이 260만원이니까 그 안에서만 쓰면 됨.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260만원'에 내 흥은 급격히 시작했다. 

아니, 지금 나 흥 오른 게 안 보이나..? 설마 내가 500만 원씩 써가며 해외여행을 갈 거 같았나?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을 이리저리 흘려보내다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우리 한 달에 10만원씩 여행비 따로 모으고 있잖아. 그게 260만원이거든. 너가 여행 계획한다길래 먼저 예산을 알려준 거야. 통장은 내가 관리하니까 얼마인지 모를까 봐."


퍽이나 고맙다 고마워. 


그 이후로 몇 번의 딜을 통해 조금이라도 예산을 늘려보려 했지만 나오는 답은 똑같았다. 


"아, 그럼 너가 좀 더 보태도 되지."


우린 서로의 보너스는 건드리지 않고 각자가 모으거나(주로 남편은 이런 쪽) 펑펑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로 돈을 쓰고(주로 내가 이런 쪽^^) 있다.


하아... 그래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지금 당장 여행에 목마른 내가 260만원이라는 예산 안에서 여행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마냥 즐겁진 않았다. 

그러던 중 일하러 간 카페에서 우연히 육아 동지로 묶인 이웃을 만나 이런저런 얘길 하다 "260만원 여행 이야기" 털어놓으니 대번에 말한다. 


"와, 어쩜 서로 잘 만났네!!!"

"네..? 뭐가요?"

"복덩이아빠는 복덩이엄마 같은 흥 많은 사람 만나 인생이 재밌어질 거고, 복덩이엄마는 복덩이아빠 같은 사람 만나서 재정이 파탄날 일은 없을 거 아니에요!!"


맞는 말이다. 암, 우린 서로 참 잘 만났다. 

귀가 얇고 긍정적인 나는 다시 즐거운 마음이 급속 충전이 되어 260만원 안에서 갈 수 있는 해외여행지를 찾고 있다. 

뭐, 이것저것 다 떠나서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니 얼마나 그 자체로 행복한가.


그리하여, 뚜둔!! 

아이 세 돌 맞이, 현실 탈출, 추억 쌓기 등등을 위한 260만원 여행 계획 시작이다~!



덧붙여서, 문득 여행 통장 얘길 하던 남편이 갑자기 물어봤다.


"너 요즘 우리가 얼마나 저축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무슨 소리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 어쨌든 잘 모으고 있어."


1년에 주기적으로 통장을 정리하며 우리가 모은 돈, 크게 나간 지출(주로 자동차 관련), 앞으로 예상되는 지출 금액 등을 꼬박꼬박 나에게 알려준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남편이다.

대신 내가 좀 더 힘내서 많이 웃게 해줄게! 고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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