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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 Apr 13. 2024

세상에 버릴 경험 하나 없다

좌충우돌 독립영화 촬영기

 나는 싫증을 잘 낸다. 사람에게는 아니고, 반복되는 일과 환경에 쉽게 질린다. 심지어 업으로 하는 사진 일에도 잘 질려서 그 안에서 계속 새로운 걸 찾아 하는데 취미의 경우는 더 심하다.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일단 거침없이 시도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오래가는 것은 없다.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기 그지없어 나는 왜 한 가지를 진득하게 하지 못하나 이유를 생각해 봤다. 싫증과는 또 다른,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고 싶은 도둑놈 심보가 있었는데 익숙한 것을 더 잘하게 되기까지 들여야 하는 공보다 새로운 걸 시작할 때의 설렘과 활력이 더 편하고 좋았던 거다.


 지난여름은 따분하고 무기력해서 새로운 걸 배워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여행조차 귀찮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무료함에 지쳐있던 9월 중순, 알고 지내는 독립영화감독인 P에게서 연락이 왔다. 구상 중이던 시나리오가 완성됐으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뭐야! 그 영화 찍는 거였어?!!’


 지난 1월 P를 만났을 때, 그는 사진작가가 나오는 영화를 만들 거라며 나에게 배우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연기는 대학 때와 직장 생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도한 적이 있다. 그때 느낀 당혹감과 패배감이란... 평소 감정 표현의 폭이 크지 않은 내게 감정을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해 전달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연기에 재능 없음을 알고 깔끔하게 돌아섰는데 영화감독으로부터 배우 권유를 받은 것이다.

 나의 발연기와 흑역사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영화 내용이 매력적이었다. 이태원 참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희생자와 유가족에 위로를 건네는 메시지와 취지가 좋아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러마고 했다. 실은 그때는 P가 지나가듯이 얘기한 거라 그냥 한 번 해 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찍을 줄이야!


소이작도의 로케이션 헌팅한 옛날 집


 엄청난 부담감이 밀려왔다. 연기도 연기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부정확한 발음도 문제였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진사 K는 영화에서 촬영을 맡게 됐다. 그는 내 대본 연습을 도와주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목표를 수정하자고 했다. 연기 잘하는 걸 목표로 하지 말고 민폐 안 끼치고 욕을 덜 먹는 것으로 하자고.


 구부정한 허리 펴고 또박또박 말하는 연습부터 대본 분석, 캐릭터 이해, 대사 끊어 읽기, 감정 넣기 등등 할 게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영화 촬영이 시작되는 10월에는 클래스 신청해 놓은 것도 있어서 정신없이 바빴다.


영화 촬영지 소이작도 해변


 P는 이제껏 5분에서 10분 미만의 짧은 작품만 만들었는데 스텝도 없이 거의 혼자 하다시피 했다. 이번 영화는 러닝 타임이 30분인데 스텝 인력이 없어 나는 P와 로케이션 헌팅도 함께 했다. P는 나에게 조연출 역할과 촬영 시 스크립트대로 촬영하는지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도 부탁했다. 내 연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버거웠지만 일손이 정말 부족했기 때문에 대본을 조각조각내서 촬영 스케줄과 동선을 짰다.


 촬영은 K가 DSLR(디지털 일안반사식 카메라)로 촬영하고 P가 스마트폰 카메라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건강 때문에 촬영이 어려워진 P는 내가 나오지 않는 신의 촬영까지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오 마이 갓! 내가 사진사이긴 하지만 나는 스틸 사진(still photograph)만 찍었지 동영상은 찍어본 적이 없다. 영상 언어와 문법은 하나도 모르는데 나보고 영화 촬영을 하라고?  


 이쯤 되니 연기에 대한 부담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맡은 일이 너무 많다 보니 피로와 압박감 때문에 턱 밑에 뾰루지가 나고 몸이 팅팅 부었다. 내가 출연하는 신 직전까지 촬영하고 장비 챙기다 머리카락 빗질 한 번 못하고 연기에 임했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니 연기도, 촬영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나와 K는 이미지(image)와 미장센(mise-en-Scene)과 같은 시각적 부분도 신경 쓰고 싶었지만 전직 방송작가였던 P는 주제와 서사만 중요하게 생각할 뿐 영상의 완성도에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는 듯했다. 또한 P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여러 사람들과 즐기며 촬영하는 그 자체에서 만족을 얻는 타입이었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하는 일인데 결과물이 좋으면 좋겠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걸 어쩌겠는가.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 경험이 만족스럽지 않고 고될수록 이 일이 나에게 준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영화를 찍게 되면서부터 촬영을 끝낸 지금까지를 곱씹어 봤다. 처음에는 단순히 배우 경험을 하며 내 안의 감정을 살피고 나를 표현하는 연습을 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나리오 구상 단계부터 로케이션 헌팅, 촬영 스케줄 신별로 정리하기, 소품 준비, 촬영 등과 같이 전 과정에 참여하며 주체적인 입장에서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울 수 있었다. 실로 값진 수업이 아닐 수 없다.


 이 경험을 왜 하게 됐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좋아하는 다큐멘터리가 두 편 있다. KBS 6부작 다큐멘터리 <차마고도(茶馬古道)>와 <메루, 한계를 향한 열정>(2015)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motol91님 블로그


 차마고도는 중국 서남부 윈난, 쓰촨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 인도까지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험한 차 교역로를 일컫는다. KBS는 실크로드보다 앞선 문명, 문화, 경제 교역로 써의 차마고도를 살피고, 동북아시아에서 인도까지를 잇는 21세기 아시아의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며 5,000km 차마고도 전 구간을 탐사했다. 내가 <차마고도>를 처음 본 2007년은 대학원에서 중문학을 공부하던 때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족(漢族) 중심 중원(中原)의 역사보다는 티베트, 위구르, 내몽골과 같은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마음이 더 끌린다. 당시 좋아하는 지역에 관해 잘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며 광분한 기억이 있다.


이미지 출처 - watcha.com


 <메루, 한계를 향한 열정>은 세 명의 전문 산악인이 히말라야에서 가장 위험하고 난도 높은 봉우리인 메루의 샥스핀을 등정하는 이야기다. 전문 산악인들에게 교과서처럼 여겨질 정도로 높은 사실성과 생생함을 갖췄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를 촬영한 지미 친(Jimmy Chin)이 등반과 촬영을 동시에 맡았다.


 예전에 이 두 편의 다큐를 보며 나도 중국 소수민족, 특히 티베트인(Tibetan people)의 삶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나 내가 좋아하는 산 다큐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 촬영 작업을 경험해 본 지금 촤라락 퍼즐 맞춰지는 소리가 들린다. 난데없이 영화를 찍게 된 것, 유혹하고 전달하는 글쓰기를 배우게 된 것(물론 책도 쓸 거다), 내년에 네팔에 가게 된 것, 같이 산 타고 촬영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 심지어 중국어는 지금 하고 있는 사진일과 하등 관계없고, 졸업 후 전혀 쓸 일 없이 다 잊어버려서 도대체 왜 전공한 건지 의문이었는데 내가 중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까지 모두 퍼즐이 맞춰진다. 중국의 지배하에 있는 티베트에 관한 다큐를 찍으라고 그리되었나 보다!


 영화 <127시간>(2011)에서 협곡에 떨어져 조난당한 애런이 큰 바위에 팔이 끼어 127시간 동안 고립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팔을 자른다.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있다.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이렇게 될 거였어.

 여기, 바로 이곳. 난 태어났을 때부터 이 돌을 향해 달려온 거야...

 이 모든 게 예정되어 있었어.

 이 돌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도 나의 예정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중일 것이다. 그것 또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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