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리움
모든 현대인은 카프카적 문제에 직면해있다. 이때의 ‘카프카적’이라는 표현은 그저 음울한 분위기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부조리로 차있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소멸은 나와 내 주변의, 의식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카프카적 문제이다. 허나 이에 대해 예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관조할 뿐이다. 대안을 제시하거나 조언하는 예술은 그 자체로 예술적 가치를 배반하는 것이기에 예술은 현대인의 고통을 보다 차갑게, 때론 뜨겁게 조명한다. 그리고 이 예술은 감겨있던 눈을 띄운다.
로칸 피네건의 <비바리움>은 말 그대로 ‘비바리움’ 그 자체이다. 비바리움은 실험 목적으로 대상을 가두어놓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동물 시험에서 자주 본 케이지가 비바리움의 일종이다. 영화 <비바리움>도 마찬가지인 것은 꽤나 직관적이다. 욘더(yonder, 저편이라는 의미이다.)라는 주택가 속에서 갇혀 사육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곧 그들은 그저 감독이 진행하는 실험의 대상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제목과 같은 맥락으로 말이다. <비바리움>의 실험은 매우 흥미롭다. 끝없이 펼쳐진 똑같은 주택 속에서 똑같은 보급품을 주며 주인공들의 부부생활을 관찰하는 <비바리움>의 실험은 아이의 등장과 양육, 주인공의 탈출 시도를 통해 극도의 텐션을 이어간다. 특히나 아기에 대한 피니컨 감독의 염세적 입장은 마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에서 등장한 자녀의 기능과도 닮아있다. 기본적으로 가족 공동체에 대한 사무적인 관계에 집중한 듯하다. 이는 <비바리움>이 제기하는 실존적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사랑과 같은 감정이 메마른 사회 속에서 팽배해있는 부조리를 다루기 위해 기본적으로 가족애는 덜어내야 하는 요소여야 할 것이다.
<비바리움>의 영화 전체에는 ‘복제’에 대한 메타포가 깔려있다. 욘더의 시각적 특징이 그렇고, 영화의 결말에서도 그렇다. 우선 주인공인 톰과 젬마가 중개사무소로 들어왔을 때에의 장면에서부터, 소품과 벽에 걸려있는 그림, 로봇같이 행동하고 말하는 중개인의 모습에서 영화는 복제에 관해 이야기할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가 욘더를 보여주는 방식도 똑같은 집이 끝없이 복제되어 있는 풍경에서 오는 시각적 충격을 강조한 형식으로 연출되어 있다는 점, 주인공이 차를 타고 멀리 떠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모습도 모두 복제 속에 파묻혀 살고 있는 주인공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직관적인 상징은 결말에 와서 빛을 발한다. 주인공 부부가 겪는 공포와 파국은 마치 복제로 가득 찬 욘더가 주인공 가족을 집어삼킨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이 사건이 다시 반복됨을 암시하는 엔딩은 영화 속 비극마저 복제된 대상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마치 워쇼스키의 <매트릭스>에 등장한 <시큘라크르와 시뮬라시옹>처럼 <비바리움>은 복제에 함몰된 인간상을 보여준다.
복제에 함몰된 인간상이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복제에 함몰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온전히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비바리움>의 복제가 우리의 정체를 잡아먹을 수 있을까.
복제는 곧 몰개성이며, 객관화이다. 보통의 우리는 객관화된 가치를 추구한다. 객관적인 삶의 성공, 객관적인 행복, 누가 보아도 만족할 법한 삶을 추구한다. 시험 성적에 집착하는 학생, 진급에 집착하는 회사원, 등수에 집착하는 사회가 그렇다. 성적, 직급, 등수는 모두 객관화, 상대화된 가치들이다. 이를 관통하는 테마는 바로 경쟁적 이상향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 태어남으로써 경쟁에 암묵적으로 동참했으며, 그와 동시에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행복의 가치가 경쟁적이며 독점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자연스레 동의했다. 소위 말해 1등만 행복한 사회 속에서 ‘1등’이라는 경쟁적인 이상향을 위해 순위라는 객관화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객관화된 가치는 언제나 다수의 전유물이다. 객관화라는 것 자체가 다수의 숭배로서 가능한 것이기에 우리가 종종 좇는 객관화된 가치들은 보통의 다수에 의해 만들어졌고 향유되었으며,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 보통의 다수는 경쟁에 참여한 모든 우리에게 보통의 가치를 추구하라고 강제한다. 이 강제는 교육의 형태로 나타난다. 교육에서 드러나는 비교와 경쟁은 사회에 갓 등장한 사람들을 보통의 다수로 만들고자 하는 프로파간다이다.
객관화된 가치 추구의 강제는 그 대상에게 공통된 이상향을 심어준다. 그리고 이 이상향이 곧 몰개성을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같은 가치를 추구하며, 모두가 같은 이상을 향해 달려가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기에 이곳에 개성이란, 의지란, 자아란 없다. 그저 객관적인 잣대로서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자아가 없는 개체들이 이룬 집단은 고로 모두 똑같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성이 없으니 구별을 할 수도 없다. 우리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 똑같은, 복제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 또한 <비바리움>의 주인공과 같이 복제에 압도당하고 함몰되어 살아간다. 복제란 객관화이며 획일화이고, 몰개성, 곧 자아의 소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보통이라는 굴레이다. 보통이라는 굴레, 남들과 같다는 안도감과 안정은 그저 객관화를, 자아의 소멸과 복제의 압도를 정당화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남들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고, 남들과 같은 결과를 원하며 남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보통이라는 굴레에 스스로를 매어버리는 행위이며, 끝내는 그 굴레를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어떤 이상향을 가지는지에 대해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통의 다수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8368406/mediaviewer/rm2880744193?ref_=ttmi_mi_all_sf_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