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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불편의 미학.

살인마 잭의 집

라스 폰 트리에의 2018년작 <살인마 잭의 집>은 아마도 필모그래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 될 듯하다. 이 점에서 <살인마 잭의 집>은 라스 폰 트리에의 자전적인 이야기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영화이다. 이번 글에서는 라스 폰 트리에의 2018년작 <살인마 잭의 집>을 샅샅이 살펴볼 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의 표현 수위가 매우 높고 잔인하기에, 그 영화를 다루는 이 글의 일부분도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독자들께 주의를 드린다.)


우선 가장 보기 쉬운 것부터 살펴보자. <살인마 잭의 집>은 주인공 잭이 버지에게 자신의 살인 사건을 이야기해 주며 플롯을 진행시킨다. 크게 다섯 가지의 사건이 제시되고, 이 사건들 사이를 잭과 버지의 대화를 통해 연결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 이후 에필로그에서는 잭과 버지가 지옥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다. 사실 내용에서부터 봐도 알겠지만, <살인마 잭의 집>은 단테의 <신곡>을 강한 모티브로 가지는 영화이다. 버지(Verge)의 이름도 베르길리우스(Vergillius)에서 왔고, 버지가 길잡이가 되어 잭을 지옥으로 안내한다는 점, 버지의 현학적인 말투, 잭의 대사인 “전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I wanna know everything.)”, 그리고 에필로그의 등장하는 엘리시움(림보)와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 패러디까지. 심지어는 작중 삽입 자료로서 <신곡>에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삽화가 자주 등장하고, 버지의 대표작이자 단테가 찬양했던 <아이네이스>까지 언급된다. 이후에도 설명하겠지만, 잭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스스로의 일부를 투영시켜 만들어낸 캐릭터이기에, 내용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적절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다섯 가지 각각의 사건들을 보면, 모두 표현의 수위가 매우 높고, 금기시되는 소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있다.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조금 들여다보면 시체 훼손, 아동 살인과 시체 박제, 새끼 오리의 발을 잘라내는 아이, 여성의 가슴을 도려내는 등 읽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행동들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원제도 ‘A House That Jack Built’이다. 잭이 무엇으로 집을 지었을까 예상해보라.) 개봉 당시 칸 영화제 상영 20분 만에 관객들이 야유하며 극장을 나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면, 이 영화가 얼마나 불쾌하고 기분 나쁜 영화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쾌함은 단지 잔인함에서만 오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잭과 버지의 대화 속에서 잭이 이야기하는 ‘살인은 예술이다‘라는 논점은 우리의 도덕적 관념을 공격한다는 점이다. 잭은 지옥으로 가는 여정 중 버지에게 자신의 주장을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양>과 <호랑이>, 와인 제조 방식 중 자연 발효 방식, 슈페어의 폐허가치 이론, 또 버지의 대표작 <아이네이스>가 전작을 파괴함으로써 얻어진 작품이라는 점을 들어 파괴와 죽음이 예술의 창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라고 말했듯, 잭은 창조와 파괴, 사랑과 살인, 선과 악 모두 하나로서 인간에게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며, 전자가 예술을 창조하듯 후자도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이다. 마치 니체의 이론처럼 잭의 논증은 아주 과격하고 공격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설득력을 갖추기도 했다. 그렇기에 잭과 버지의 대화를 함께 참여하고 있는 관객은 잭의 설명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보편적 도덕의식이 공격받음을 느낀다. 즉, 이 영화는 각본으로써 우리를 의식적으로 조종하려 들고 있다. 여기에서 오는 우리의 방어기제가 바로 불쾌함인 것이다. 이 영화는,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여느 영화처럼, 우리를 의도적으로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잭의 이 철학은 연출로서 또한 드러난다. 영화 내내 이원론적인 이미지가 등장한다. 잭이 밴으로 행인을 죽였을 때 한쪽 헤드라이트는 피가 묻어 붉은색으로 빛나고, 다른 쪽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모습, 얼어붙은 시체와 피가 흐르는 시체, 에필로그에서 잭과 버지의 시각적 구분, 지옥에서 등장한 물레방아 한 쌍, 연인의 가슴을 도려낼 때 쓴 빨간색과 검은색 마커 펜 등등 영화는 잭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그 반대의 검은색을 한 프레임 안에 강박적으로 담아낸다. (영화 초반에 빨간 잭이 의미심장한 것도 이 지점이다.) 잭이 매력을 느끼는 현상하기 전 네거티브 필름 이미지에서는 빛에 내재된 악마적인 속성을 흑백 반전 보정으로, 즉 빛 속의 어둠을 보여주며, 잭이 이야기하는 ‘풀의 숨결’ 또한 풀의 죽음에서 그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친 양극에 대한 직관적인 메타포는, 선악이 사실 하나이며 살인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잭의 철학에 힘을 실어준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의도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놀라운 연출적 디테일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 의도는 라스 폰 트리에의 스타일과도 맞아떨어진다. 1995년 덴마크의 몇 영화인들 사이에서 ‘도그마 선언’이 발표되었다. 도그마 95라고도 불리는 이 선언은 영화의 산업적 방법을 벗어나 창작 최초의 모습을 되살리고자 시도했던 영화적 운동이자 실험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카메라 스탠드를 사용하지 않기’, ‘세트 촬영 없이 모두 로케이션으로 촬영하기’ 등이 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 도그마 95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서, 필모그래피 전반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일명 ‘도그마 95 스타일’은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 보이는 잭과 우마 서먼 역 여성의 장면에서부터 드러나는데, 핸드 헬드 카메라로 촬영한 자유로운 시야, 줌과 클로즈업의 집요함,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배어 나오는 불안정함은 <살인마 잭의 집>이라는 영화가 이렇게 만들어졌음을 불친절하게 알리는 경종의 역할을 한다. 이 특유의 스타일은 관객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이 기법이 영화의 몰입감을 극도로 높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틸 카메라나 레일로 촬영한 장면은 시야의 움직임이 아주 절제되어 있다. 마치 CCTV 촬영 장면을 보는 것처럼 관객은 이 장면이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것이라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의 스타일은 전혀 반대이다. 온전히 헨드 헬드로 촬영된 라스 폰 트리에의 장면들은 카메라가 장면 속에 존재하는 인물의 시야를 가진다. 즉, 실제 배우들 옆에 있는 한 인물이 고개를 돌리는 듯한 움직임을 취한다. 이때 관객은 이 시야가 카메라의 시야가 아닌, 이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나의 시야라고 인식하게 된다.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를 완전히 좁혀버리는 것이다.


거기에 <살인마 잭의 집>에서는 점프 컷을 적극 활용한다. 점프 컷이란, 연결 동작에서 중간을 드러내는 편집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장면을 찍는다고 생각해 보자. 배우는 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와서, 카운터까지 걸어간 후, 직원에게 커피를 달라고 주문해야 한다. 이때 카메라는 이 과정을 모두 연결해서 보여줄 수 있다. 문을 열고, 카운터까지 걸어가고, 커피를 주문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반대로, 들어오는 모습과 주문하는 모습만을 보여줄 수 있다. 이는 배우가 문에서 카운터까지 걸어가는 부분을 편집해버리면 가능하다. 이때 관객은 배우가 문을 여는 모습 다음에 바로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점프 컷이다. 이 기법은 종종 영화의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살인마 잭의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점프 컷은 아주 미세하고 순간적이다. 특히나 음향 편집과 연계되어 잘 드러나는데, 영화 중간중간에 음향은 이어지는데 컷이 미세하게 바뀌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잭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목소리는 끊이지 않지만 말하는 장면의 각도가 약간 바뀐다든지, 인물의 구도가 바뀐다. 이 점프 컷은 작품의 리듬감을 살리는 것보다, 장면의 연속성을 고의적으로 끊어버려 관객들이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마치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에서 초반 짐 캐리 역과 케이트 윈슬렛 역이 대화하는 기차 장면처럼 관객에게 일부러 어색하고 불안정한 인상을 심어준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한 작업이다. 이런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를 무의식적으로도 조종하려고 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과감한 제작 방식도 용인된다. 중반부에 잭이 시체를 쌓아논 냉동 창고 중앙에서 카메라가 마구잡이로 회전하며 촬영된 혼란스러운 장면이나, 달려가는 잭을 따라가는 핸드 헬드 카메라의 강한 흔들림, 에필로그에서의 시그니처적인 슬로우모션, 대화 소리를 묻어버리는 날카로운 굉음은 라스 폰 트리에와 촬영 감독인 마누엘 알베르토 클라로의 역량과 창의력을 드러냄과 함께 결코 관객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비범한 의지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 모든 실험들이 전부 영화에 어울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차용한 요소들을 보면, 온갖 삽입 장면들과 감독 자신의 전작의 몽타주, 글렌 굴드의 <파르티타 2번 다단조 BWV 826>, 데이빗 보위의 <Fame>, 윌리엄 블레이크의 아방가르드한 <신곡> 삽화 등등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소스들을 한데 모아 잭과 버지의 대화 아래 완벽하게 녹여 냈다. 심지어는 얼굴이 갈라진 시체의 얼굴과 후안 그리스의 <Head of a Woman>을 디졸브시킨 장면이나, 둔기로 살인을 저지르는 음향 아래 온갖 화려한 서양화를 삽입한 편집은 부자연스러움을 넘어선 자료 선택을 유려하게 흐르도록 만들어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편집을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잭과 버지의 나레이션이다.


<살인마 잭의 집> 속 나레이션은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위에서 언급한 잡다한 소재를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 어떤 관객도 라스 폰 트리에의 사이코 패스 연쇄살인마 영화에 와인용 포도를 숙성시키는 장면이나 고딕 양식이 자재를 절약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이 영화는 나레이션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자료가 부드럽게 연결될 수 있었다. 두 번째,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나레이션은 웨스 앤더슨의 <로열 테넌바움>이나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처럼 작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나레이팅’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예를 들자면,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나레이션과 유사하다. 이 영화의 나레이션에서 “나는 흰 차를 타고-”라고 하면 영화는 흰색 차량을 보여주지만, 나레이션이 “아냐, 그 차는 빨간색이었어.”라고 정정하는 순간 영화는 차의 색을 흰색에서 빨간색으로 슬쩍 바꾼다. 이런 식으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나레이션은 제 4의 벽이라고 하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살인마 잭의 집>의 나레이션 또한 제 4의 벽을 허문다. 영화가 글렌 굴드를 보여주면 나레이션에서 버지가 “이 요상한 청년은 누구인가?”라고 잭에게 질문한다. 즉, 잭과 버지도 우리가 보는 이 장면들을 함께 보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런 나레이션을 들으며 자신이 잭과 버지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고 느낀다. 작품이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세 번째로, 작품 전체의 흐름을 조절한다. 나레이션 자체가 대화 형식이니만큼 잭과 버지가 말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만들어낸다. 두 시간 반 정도 되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플롯을 구성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들리는 나레이션은 지옥으로 가는 구덩이에 떨어진 직후 에필로그 오프닝에서의 대화이며, 이후의 나레이션 일부도 에필로그의 대화와 겹친다. 이는 영화의 메인 파트와 에필로그를 병치시키기 위함인데, 이 둘은 같은 시간대에서 일어나지만 전자는 잭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후자는 잭과 버지의 여정을 중심으로 감상하도록 한다. 특히나 전자에서 보았던 잭의 이야기가 후자에서 반복되면서, 결국 이 영화가 잭을 심판하고 지옥에 도달시키기 위한 영화임을 상기시킨다.


<살인마 잭의 집>의 나레이션은 이 외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바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독백의 기능을 한다. 잭이 우상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감독을 구설수에 오르게 한 “나는 히틀러를 이해한다” 발언의 속뜻을 설명하는 것으로, 예술의 잔혹성과 예술가의 욕망을 설명할 때에는 감독 본인에 대한 비난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 점에서 잭이라는 인물 자체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자아를 상징하는 듯하다. 잭이 ‘우리 사회에 역겨운 것들이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져왔다’라고 말하거나, 세 자녀를 살해한 후 “Don’t look at the acts, look at the works”라고 하거나, 성차별이나 무관심에 관해 말할 때의 모습은 마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문제적인 작품들을 보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금기시되고,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지만 들어야 할 이야기를 가감 없이 담아내는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들은 잭의 문제적인 사고방식과 닮아있다. 잭이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이다. 잭은 영화 내내 집을 지으려고 했지만, 정작 지었던 것은 사형대였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 가서 잭은 집을 지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댕의 <지옥의 문>을 연상케 하는, 자신이 죽였던 시체들로 지은 집이다. (또 다른 <신곡> 오마주이다.) 잭은 영화 초반에 ‘건축 자재의 고유 의지를 따른 건축물이 가장 아름답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끝내 잭은 건축 자재의 고유 의지를 따라 냉동 창고의 얼어붙은 시체로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잭이라는 인물의 완성을 의미한다. 마치 라스 폰 트리에가 그의 문제작을 만들며 자아를 실현하듯, 잭은 시체로 집을 지으며 자아를 실현한 것이다.


그렇기에 에필로그의 마지막은 매우 흥미롭다. 잭의 구원에 대한 욕심이 결국 잭을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한 부분은 곧 라스 폰 트리에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레이 찰스의 <Hit the Road, Jack>은 지옥에 떨어진 잭에게 ‘꿋꿋이 갈 길을 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는 다시 라스 폰 트리에의 인격적 말로와 같다. 아마도 자신 스스로 지옥에 갈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정진해나갈 것을 다짐하는 듯한 영화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체적으로 <살인마 잭의 집>은 아주 지독한 영화이다. 우선,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주 침착한 분위기에 있다. 네 번째 사건에서 잭이 재클린을 살해하려 할 때에도, 일반적인 연출이라면 점프스케어로 잭을 보여줬을 테지만, 이 영화는 관객을 절대로 놀래키지 않는다. 그 대신, 아주 덤덤하고 침착하게 모든 것을 전부 보여준다. 아동의 시체를 박제하는 과정이나 얼굴이 갈려버린 시체의 모습을 그래도 드러낸다든지, 여성의 가슴을 도려내는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든지, 죽은 두 남자아이에게 파이를 떠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는 매우 미적인 구도로 잡아낸다. 잭과 다른 인물의 아주 어색한 대화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그렇다. 이는 아주 지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설득하려 드는 잭의 스탠스의 연장선 상에 있다. 아주 무덤덤하게 잔혹한 말을 꺼내듯이, 무덤덤하게 잔혹한 묘사를 카메라로 비추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관객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여줌과 동시에 아주 섬뜩하고 역겨운 장면들을 담아냄으로써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동시에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도그빌>같은 감독의 이전작에서 항상 활용하던 전매특허인데, 고전적인 제작 방식과 실험적인 낯설게 하기 방식을 배합해 관객이 스스로 혼란스러움을 느끼도록 한다. 관객은 이런 감독의 작품을 보며 감정 이입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게 되기에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내면에서 깊은 혼돈을 느끼게 된다.


이 줄다리기는 음향에서도 반영된다. 도그마 선언에서 배경에 깔리는 음악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음향은 장면이 진행되는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배경 음악 없이 장면을 진행해 몰입감을 높이고 있다. 때로는 새소리와 같은 효과음을 통해서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편안함과 몰입감은 특유의 반복적인 효과음이 나오면서 완전히 깨져버리고 관객은 다시 긴장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렇게 감독은 관객의 집중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친절한 구도 선택도 마찬가지이다. 잭과 피해자의 1 : 1 상황에서 감독은 우위를 구도로 표현한다. 강자는 아래에서 위로 카메라를 비추고, 약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피해자의 목을 조르는 것도 수직적인 구도이고, 일반적인 인물의 병렬적 나열에도 카메라 각도를 조절해 누가 누구를 위협하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구도 선택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잔혹한 살인 장면일 때는 전혀 친절하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몰입을 유도함과 동시에 방해하고 있다. 이렇게 <살인마 잭의 집>은 관객을 철저히 감독의 손안에서 주무른다.


<살인마 잭의 집>은 온갖 방식을 동원해 관객에게 불편함을 선사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자체마저 우리에게 불편함을 준다. 어떻게 예술이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스 폰 트리에는 작중 인물인 잭이 되어 우리를 설득하려 하는 것이다. 이 설득은, 이번 영화뿐이 아닌, 감독 본인의 필모그래피 속 모든 영화가 단지 불편하고 불쾌하다고 해서 예술적 가치를 묵살하는 모두에게로 향한다. <살인마 잭의 집>은 내가 알고 있는 영화 중, 불편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품이다.


현대 영화계에서 가장 문제적인 감독을 꼽으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라스 폰 트리에를 이야기할 것이다. 도그마 선언, 비전형적인 기법과 금기를 다루는 감독의 사유는 예술이 한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살인마 잭의 집>은 이 유서 깊은 영화사적, 예술적, 철학적 질문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 만의 대답이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4003440/mediaviewer/rm203745793?ref_=ttmi_mi_all_sf_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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