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에
조금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한 줄 정도의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가끔가다 여태껏 적어왔던 메모를 읽어보곤 하는데,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메모 중 하나가 바로 왕가위의 <화양연화>였다.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버전이 재개봉되었을 때 영화관에서 직접 보았는데, 당시 이 영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당시에 썼던 메모이다.
"아마도 가장 세련된 영화."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장‘이라는 표현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양연화>를 보고 나서는 그 표현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당시에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만큼이나 세련되고 아름다운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화양연화>가 가장 세련된 영화일 것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을 제대로 반박한 영화가 있다. 바로 장 피에르 주네의 2001년작 <아멜리에>이다. <아멜리에>는 내가 본 영화 중 유일하게 <화양연화>와 대적할 수 있는, 아주 세련되고 아름다운 영화이다.
<아멜리에>가 뛰어난 점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로, 영화의 세련미는 <아멜리에>의 촬영 속에서 볼 수 있다. <아멜리에>의 카메라 모션은 우아하다.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계속해서 장면을 선사하는데, 이는 마치 관객이 직접 영화 속 공간에 들어가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줌(zoom)보다 패닝(panning)이 더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 속 패닝을 비롯한 부드러운 카메라 모션은 구도, 인물의 시선, 혹은 사물의 움직임을 따라 흐른다. 이는 우리 스스로의 시선이 움직이는 원리와도 같다. 우리의 초점이 항상 무언가를 따라 움직이듯이, <아멜리에> 속 카메라도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해 단조로움을 주지 않는다. 중간중간 과감한 줌인이나 빠른 돌리 샷(dolly shot)과 클로즈 업, 혹은 영화의 엔딩에서 볼 수 있는 흔들리는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부감 샷도 마찬가지인데, 아망딘과 아멜리가 어항을 버리는 장면에서의 부감 샷은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런 과감한 터치는 놀라울 정도로 디테일한 조작으로 완벽해진다. 예를 들면, 아멜리의 엄마 아망딘이 싫어하는 것을 소개하는 장면 중 시장 장면을 살펴볼 수 있다. 아망딘은 자신의 손이 가게 주인의 손과 닿으려 하자마자 바로 몸을 뒤로 빼는데, 카메라는 이를 정적으로 담지 않고, 아주 세심하게 아망딘 쪽으로 움직여 순간적인 흐름을 살렸다. 그리고 이런 디테일함은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망딘이 아멜리를 가르치는 장면에서의 아주 느린 줌인, 매들린과 아멜리의 대화에서의 편지 클로즈 업 등 아주 세밀하게 조작된 카메라는 영화 전반의 흡입력을 보다 더욱 강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촬영은 편집과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영화 초반 크레딧이 끝난 후 부모님 소개 부분이나 카페 동료 소개 부분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정신없을 수 있는 촬영을 놀라운 편집을 통해 살려냈고, 거기에 속도감과 리듬감까지 가미했다. 엄청난 정보량과 빠른 나레이션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촬영과 편집 덕분인 것이다.
계속해서 언급하지만, 이런 촬영과 편집은 초반부의 아멜리 부모 소개 부분에서 가장 돋보인다. 크레딧이 끝나자 마자 아멜리의 아빠 라파엘이 중앙에 서 있고, 카메라는 풀 쇼트에서 클로즈업으로 빠른 돌리 샷을 통해 시점을 바꾼다. 이후에는 라파엘이 싫어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첫 장면인 화장실에서는 인물의 구도에 맞춰 수평으로 카메라가 움직인다. 다음 장면인 기차역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각을 따라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패닝하고, 라파엘의 얼굴에서 신발로 가며 수직으로 움직인다. 수영장 장면에서는 밑에서 올라오는 라파엘의 움직임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다음 벽지를 뜯는 장면에서는 벽지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다음 신발을 광내는 장면에서는 라파엘의 시각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은 전부 2분이 채 되지 않는다. 아주 바쁜 카메라 움직임을 따라 관객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아멜리에>의 촬영과 편집의 조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편집에 대해서 더 짚고 넘어가자면, <아멜리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장면 삽입이다. 영화 곳곳에서 옛날 영상이나 사진이 삽입되는 부분이 자주 보이는데, 사실 이마저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보통 영화 중간중간에 갑자기 해상도가 다른 흑백 영상을 집어넣고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데, 특히나 <아멜리에>에서 다룬 영상의 소스들이 임산부의 출산, 투우, 학생들의 괴롭힘, 손을 푸는 모습, 운동선수가 우는 모습 등등 전형적이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에 이를 매끄럽게 삽입했다는 것 또한 집중해 바라볼 만하다.
세 번째는 색채이다. <아멜리에>를 보면서 첫눈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색감이다. <아멜리에>의 모든 장면은 전부 파스텔 톤으로 전체적인 색감이 조정되어 있다. 이는 관객이 매우 편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아름다우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며 가장 눈에 띄는 색은 단연 초록색과 빨간색인데, 이는 아멜리의 엄마 아망딘의 소품부터 시작해 영화를 지배하는 시각적 모티브가 된다. 예를 들어 약간 어두운 화면의 전체 톤을 초록색으로 맞추고 빨간색 물건을 배치하거나, 빨간색 벽지 속 밝은 초록색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초록색과 빨간색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러한 초록과 빨강의 반복을 통해서는 시각적으로 다른 색을 자연스럽게 강조시키는 효과도 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멜리와 니노가 처음 만났을 때의 파란색 사진 부스라던지, 니노가 따라가는 파란색 화살표, 니노의 일터 속 파란색 커튼 등 장면 속에서 특정 부분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도 가진다.
네 번째 포인트는 연출에 있다. <아멜리에> 속의 연출은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스토리라인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위트를 첨가한다. 가령 아멜리의 심장, 주머니 속 열쇠를 반짝이는 이미지로 보여주거나 갑자기 니노에게 사진이 말을 거는 장면들은 작위적이면서도 흥미롭다. 레코드판을 팬케이크로 만들거나, 악어 인형이 살아 움직이거나 액자 속 동물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 또 티비 속 등장하는 아멜리의 모습은 아멜리가 얼마나 자신의 내면세계에 빠져있는지도 표현한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가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임을 반증한다. 아멜리의 우울함을 표현하는 것도 아멜리의 표정이 아닌, 물로 변하는 아멜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이런 모든 몽환적 연출은 <아멜리에>가 가진 환상적인 분위기에 힘을 더해준다.
마지막으로는 영화의 각본이 있다. 무엇보다도 <아멜리에>의 매력을 살리는 것은 영화 속 인물 디자인이자 스토리이다. 우선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영화는 아멜리가 자신을 비롯한 자기 주변의 모든 존재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이는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나레이션은 파리를 소개하는데, 말이 마친 직후 파리는 차에 깔려 죽는다. 그 다음으로 나레이션은 바람을 맞아 쓰러질 듯한 와인잔을 ‘바람과 춤을 추고 있다’고 묘사하고, 이후 유진 콜레르라는 사람이 죽은 친구의 연락처를 지우는 모습을 비춘다. 이는 모두 죽음이나 우울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파리의 날갯짓을 살펴본 순간 차에 깔려 죽었으며, 와인잔은 쓰러져 깨지기 직전이고, 누군가는 이미 죽어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이 다음으로 나오는 장면은 아멜리의 출산이다. 즉, 오프닝은 죽음과 우울을 비추고 아멜리의 출생을 알린다. 엔딩에서는 반대로 영화 속 인물이 모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멜리 또한 자신의 사랑 니노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를 오프닝과 연결해보면, 죽음과 우울, 아멜리의 탄생, 행복 순서이고, 이는 곧 불행하던 세계가 아멜리의 탄생 이후 행복을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시작과 끝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조금 부실할 것이다. <아멜리에>에서는 이 이야기에 아멜리의 서사가 더해진다. 바로 니노와 사랑에 빠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키워드인데, 아멜리에게 사랑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보자. 아멜리가 어렸을 때, 아빠인 라파엘은 아멜리가 심장병을 가지고 있다고 오인한다. 하지만 이는 아빠에 대한 사랑과 애정 때문에 심장이 뛰었던 것이다. 즉, 사랑을 병으로 오인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또한 외부와의 접촉 없이 긴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니노에게 첫눈에 반하는 순간에도 영화는 아멜리가 니노에게 반했다고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와 반면에 니노는 성인용품점에서 일하고 있다. 아멜리의 카페와는 정반대인 환경이며, 성과 사랑, 아멜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 이미지이다. 아멜리가 니노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다르게 보면 아멜리라는 자아가 성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초반에 아멜리가 다른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과는 대비된다.)
<아멜리에>는 1차원적으로 보았을 때 위와 같은 이야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 다르게 가진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멜리에>는 제목 그대로 아멜리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영화 속 공간은 곧 아멜리의 내면 세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속 화가인 듀파엘, 루시엥, 니노 등 모든 인물이 바로 아멜리의 자아인 것이다. 특별한 점은 바로 아멜리와 듀파엘의 관계이다. 아멜리와 듀파엘은 서로를 창문 너머로 바라만 보아왔다. 이는 아멜리가 오랜 시간동안 외부의 접촉 없이 자라온 것을 연상한다. (절묘하게도, 듀파엘도 똑같이 살아왔다.) 아멜리의 취미 중 하나는 영화관에서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고, 이와 대비되어 듀파엘은 한 인물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멜리는 표정에 대해 잘 알고, 듀파엘은 표정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전반에 걸쳐 아멜리는 듀파엘에게 표정에 관해 설명하고, 듀파엘은 아멜리의 설명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반대로, 아멜리는 자신이 찾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몰라 헤맨다. 하지만 듀파엘은 알고 있으며, 아멜리에게 ‘브레토도’라고 알려준다. 즉, 아멜리와 듀파엘은 서로를 교정하는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태껏 서로의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멜리가 외부의 교류 없이 자라왔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사람의 감정에 대해 서툴기 때문이다. 듀파엘은 아멜리의 ‘감성’이며, 아멜리는 자신의 '이성'이다. 아멜리가 듀파엘에게 테이프를 보내는 것은 서로 교류하려는 시도이며, 듀파엘이 바깥도 보지 않고 숨어 지내는 것은 아멜리가 감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듀파엘은 채소 가게의 보조 루시엥에게 화내는 법을 가르친다. 아마도 고립된 환경에서 자란 아멜리는 ‘화’라는 감정을 표출하지 못할 것이다. 내면 세계 속에서 듀파엘이 가르쳐주는 것들은 전부 아멜리가 자신의 내면 속에서 감정에 대해 이해해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듀파엘과 아멜리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예를 들어 아멜리는 모든 사람의 불행을 해결하겠다는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를 한다. 이때 듀파엘은 ‘자기 자신의 불행은 누가 해결하냐’며 감정 중심의 사고를 보인다. 또한, 듀파엘이 아멜리에게 용기가 없다고 하자 아멜리는 듀파엘의 간섭이 지겹다고 상상한다. (정확히는, 티비 속 인물이 듀파엘의 간섭이 지겹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 아멜리의 내면이기에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고는 자신의 전략대로 밀고 나가지만,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아멜리를 응원하고 격려시킨 사람이 듀파엘이다. 듀파엘의 말을 듣고 아멜리는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사랑에 있어서 이성적으로만 다가가면 실패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이성은 사랑 앞에서 감성의 조언을 듣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시선을 약간 돌리자면, 어떤 단어를 정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단어의 사용 예시를 모으는 것이다. 결국 단어라는 것은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즉,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 사람을 규정하며, 더 나아가 주변 환경이 곧 그 사람을 내포하는 것이다. <아멜리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멜리에>가 아멜리라는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아멜리의 내면을 타자화하여 주변의 모든 환경으로 배치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멜리의 아빠 라파엘의 공간과 나머지 인물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이때 후자에 해당하는 공간은 곧 아멜리의 내면 세계인 것이다. 결국 <아멜리에>는 한 인물이 자신의 감성과 맞닥뜨리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이 외에도 음향,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 빛의 활용 등등 <아멜리에>가 매력적인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영화 속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 너무나도 세련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화양연화>의 한 줄 메모를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가장 세련된 영화 중 하나’로.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211915/mediaviewer/rm503898625?ref_=ttmi_mi_all_sf_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