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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모아 Sep 07. 2022

01. 안녕? 나는 오지 간호사

인생은 롤러코스터

여기서 말하는 "오지"는 단순 호주를 뜻하는 "Aussie"가 아니다. 깊을 오(奧)에 땅 지(地). 즉, remote area nurse를 말한다.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서게 됐냐고?

때는 2022년 7월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세 번째 대학교를 졸업한 것도 좋았고, 마지막 학기가 끝나기 무섭게 시작하는 뉴그랫 (호주에서 간호대 졸업 후 1년 차 간호사를 위한 취업 프로그램; 보통 1년 동안 2~3개 병동을 순환함) 오퍼를 받은 것도 좋았다.


멜번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나 정말이지 내가 대도시 공립병원에서 Registered Nurse (RN; 정규 간호사)로 잘 자리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멜번에서 앞으로 일하게 될 병원에 직접 찾아간 후 며칠 되지 않아 난 인사팀 채용 담당자와 Nurse Unit Manager(NUM; 수간호사 선생님)에게 입사 포기 이메일을 보내게 된다. 이유는 "렌트 대란 그리고 차 없이 출퇴근 불가". 내가 브리즈번에서 채용준비를 해서 멜번 현지 동네 정보나 대중교통상황을 잘 몰랐는데, 직접 가보니 내가 배정된 병원 캠퍼스는 멜번 도심에서 기차와 버스로 1시간 30-40분이 떨어진 교외(suburb)였고, 그곳은 버스 간격이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 오후 9시면 막차도 끊겼다. 이미 그 사실만으로도 3교대 근무에 차질이 생기는데, 병원이 있는 지역은 사람들이 십중팔구 혀를 내두르며 "조심하라"는 범죄율이 높은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직접 가서 본 그 지역은 기차역부터 분위기가 흉흉했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거니와 보이는 사람들은 죄다 행색이 일반인 같지 않았다. 모두들 술과 마약에 찌든 듯한 눈빛을 하고 특유의 체취를 풍겨댔다.


대중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무조건 병원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곳에 집을 찾거나 차를 사야 하는데, 병원 주변엔 제대로 된 매물이 아예 없었고 입사일까지는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태. 결국 입사일을 2주나 연장했으나, 병원 인사팀, NUM에게 계속해서 '일찍 시작해달라'는 연락이 하루에도 10통이 넘게 와서 결국 난 입사 포기까지 염두에 두게 되었다.


재취업의 상황에 대비해 당장 가진 옵션과 인맥들을 메모장에 적어보기 시작했다:


첫째, 멜번 요양원(aged care)에서 일하고 있는 전 직장 동료를 소개로 취업.

둘째, 내년 2월 시작하는 뉴그랫 지원.

셋째,


[띵!]


또 다른 헬스케어 산업에 종사하는 멜번 인맥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지난번 간호 실습을 같이 했던 대학 동기가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고 DM을 보내왔다.


서로 근황을 주고받다가 내가 병원 근처에 렌트를 찾지 못해 입사를 포기하게 될 상황을 설명하자 그 친구가 뜬금없이 "너 혹시 오지 간호사에 관심 있어?"라고 물어왔다. 순간 설렘으로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하는 삶' 그리고 오지(정확히는 외딴섬)에서 건강한 커뮤니티를 꾸리는 것이 내 오랜 인생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잽싸게 "장난해? 완전 관심 있지!"라고 했더니 친구는 자기가 얼마 전 운이 좋게 퀸즐랜드주 오지 공립병원에 취업하게 되었다며 내가 관심만 있다면 채용 담당자에게 추천을 해주겠다고 했다:


최근 오지 간호사로 채용된 친구와의 대화


친구와의 대화를 끝내고 채 몇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채용 담당자이자 NUM에게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보내고, 공식 채용 사이트에도 양식대로 지원서를 제출을 마쳤다. 졸업 직전 입사 준비를 하느라 차곡차곡 모아둔 이력서, 학위 및 성적표, 비자, 백신 접종 확인서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채용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첫날: 담당자 이메일 + 공식 웹사이트 지원

둘째 날: 폰 인터뷰

셋째 날: Certified onboarding documents 제출

넷째 날: 레퍼런스 체크, 유니폼 오더

다섯째 날: 병동 배정 및 대략적인 시작일 컨펌


이전에 지원했던 뉴그랫 포지션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채용은 뉴그랫 채용이 아닌 정규 RN 채용이라 하나의 병동을 처음부터 선택해서 1년 내내 지속적으로 근무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입사 포기를 한 멜번 병원에서 랜덤으로 배정받은 병동은 내가 적어낸 선호사항과는 전혀 상반되는 (오히려 내가 가장 비선호하는) 병동이라 입사 한 달 전부터 엄청난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왔었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꼭 내가 선호하는 병동에서 근무하고 싶어 NUM에게 내 장점들과 희망하는 과들을 어필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특수 간호팀(specialty nursing) 중 한 곳에 배정이 된 것이다! 이로써 내가 학생 때부터 희망사항으로 노래를 부르던 공립병원 + 특수 간호 + 퀸즐랜드주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잡을 구하게 되었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멜번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시작도 못해본 직장을 잃고, 또 일주일 만에 그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많은 걸 얻다니!' 인생은 참 롤러코스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에어비앤비(Airbnb) 숙소 창 밖으로 오후의 햇살에 비친 멜번의 빌딩 숲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의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한 번 올라간 롤러코스터는 또 떨어지다는 것을.


에어비앤비 숙소 밖으로 보이는 멜번C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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