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론은 개인의 경험과 지식의 폭에서 결정되니까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거다. 가설의 수립과 검증이란 건 결국은 일종의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노련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탄생하는 법이다. 나 역시 어느 정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인간의 행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심리학, 경제학, 문화학, 사회학, 뇌과학 등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틈나는 대로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실 그럼에도 하루하루 부족함을 느끼고 지금도 공부를 이어나가는 중이기도 하다.
흔히 UX 디자인, 아니 디자인 취업을 준비하는 디자인 대학 전공자들을 한번 돌이켜보자. 최근에는 예외도 있는 걸로 알지만 사실 국내 대부분의 디자인 대학의 관문은 입시 미술로부터 출발하고 입시 미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예술적 감각으로 무장한 뛰어난 표현력을 가진 친구들이 가장 우위에 설 수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넘어서기 위해 학창 시절 미술학원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며 섬세한 표현력을 다듬어 왔을 것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창의력이 깎여 나가고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자리했음을 부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 탓일까, 근래에는 UX디자이너 직군을 채용하면서 ‘전공무관'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기업이 상당수 보인다. 디자이너를 뽑으면서 디자인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에게도 자격을 열어주겠다니 건축가이면서도 뛰어난 표현력을 자랑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 같은 특별한 이들만을 위한 특례일까? 안타깝게도 속내를 들쳐보면 이런 곳에서 우대하는 전공자들을 살펴보면, 심리학이나 인지과학 그리고 사회학 등 다양한 기초학문 분야의 사람들을 채용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들은 오히려 예술작품을 빚어낼 때 유리했던 건축가의 조형미나 공간 감각과는 전혀 연이 없을 법한 친구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의 답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UX의 User eXperience를 보면 알겠지만 UX 디자인은 사용자의 경험에 관계된 분야다 보니 이 사용자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무기가 되곤 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행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기초학문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반면, 우리 같은 디자인 학도들은?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까놓고 말해 인문학적인 교양지식을 쌓을 기회가 충분했느냐 물어보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기업에서도 더 이상 UX디자인에 디자인 전공자를 고집하지 않는다. 아니 고집할 이유가 없다.
과거 디자인 전공자들이 디자이너 채용에 강점을 보였던 이유는 우리가 무기로 삼는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력이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사용에서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경험과 표현력에 툴의 숙련도가 더해지면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쉽게 대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반면 요즘은 마치 산업혁명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든 전통 예술 분야를 상기시키듯, 근래에 엄청나게 쏟아지는 다양한 디자인 툴은(심지어 무료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손쉽게 구현해 주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유일한 장점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디자인 전공자가 기초학문을 전공한 이들보다 나은 점은 무얼까?
그래서 나는 더 늦기 전에 학생들에게 닥치는 대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라고 말해준다. 로맨스 소설을 읽든 유머 사이트를 기웃대든 인간이 어떻게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지 꾸준히 이해하고 체득하라고 말이다. 물론 거기서 더 용기가 난다면 교양 심리학이나 행동 경제학 같은 인간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다룬 서적을 탐독하는 것도 적극 권장할 만한 일이다. 이런 노력 없이 UX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사회관계를 거부한 은둔족(히키코모리)은 UX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
사용자가 도대체 왜 불편해하고 이걸 어떻게 하면 만족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일이 UX디자이너의 역할인데, 타인을 이해할 방법도 능력도 없는 상태라면 어떻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내가 명절 때마다 아버지를 만나면 농담 삼아 건네는 이야기가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버지 전 재벌 2세가 꿈이니까 지금이라도 노력을 해주세요.’
다행히도 여러분이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남들보다 인문학 공부도 열심히 했고, 책도 많이 읽어서 그래도 인간을 그래도 논리적으로 추론해 볼 능력은 갖췄다고 말이다. 이때부터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사용자가 왜 불편을 겪을까?’라는 주제로 끊임없이 상상을 해보는 거다. 이때 특정한 개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면 한 두 가지의 이유가 떠오를 것이고, 특정 집단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면 그보다는 조금 더 많이, 그리고 보다 넓은 세대를 이해할 줄 안다면 더욱 폭넓은 이유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 외에도 글로벌 기업에 취업을 꿈꾸는 친구들에게는 문화권에 대한 이해까지 개념을 확장시켜야 하겠지만 그러면 끝이 없을 테니 여기까지만 하자.
사실 가설수립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한 사람의 상상력이라고 해봐야 그 개인이 가진 경험과 지식의 폭에서 결정되는 게 대부분이니까. 그런 면에서 팀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거기서 스탑! 집단지성을 기대하고 팀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대부분의 팀 작업은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뽑아내기에 그렇게 권장할만한 좋은 선택은 아니다.
여러분이 팀업을 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문제인데, 대부분의 팀 작업은 보통 친구들이나, 동아리/스터디 활동, 또는 적극적인 친구는 해커톤 hackathon에 참여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 함정이 있는데. 먼저 친구들과 팀업을 하는 경우에는 옛말에 유유상종이라 하였던가? 아마도 여러분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친구들은 대개 여러분과 관심사가 비슷하거나 유사한 생활패턴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험과 지식의 폭이 큰 차이가 없을 거란 말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구성원들로부터 촉발되는 일종의 상승효과를 기대하기가 가장 희박하다.
다음은 동아리/스터디 활동, 이 역시 대체로 친구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예외적으로 학교마다 역사를 자랑하는 동아리나 스터디 모임은 졸업생들이 멘토링에 참여하는 곳들이 간혹 있긴 한데 이 경우에는 그래도 비교적 경험이 풍부한 멘토가 있기에 기대할 만 하지만 이 사회가 척박한 탓인지 이런 멘토링에 참여하는 선배들이 매우 희귀하다. 그렇다면 소거법으로 볼 때, 대개는 친구 모임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지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그리고 마지막 해커톤. 여기부터는 확률적으로는 앞의 둘 보다는 확실히 다양한 사람을 경험할 기회가 많다. 해커톤은 개발자부터 시작해서 전문 기획자를 준비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 주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지식과 경험들을 조립해 볼 기회가 되곤 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함정은 존재한다. 보통의 해커톤이 아무래도 제한된 기간 내에 작동하는 서비스 프로토타입을 Service Prototype 도출하는 게 목적이다 보니 성격상 개발 중심적인 시각으로 흘러가기가 쉬운 편이다.
개발자가 주도하는 UX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다뤄야 할 정도로 굉장히 특징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요약하자면 굉장히 현실적인 방법론을 중심으로 사고를 확대시키는 성향이 짙다는 점이다. 현실성이 높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유일한 문제는 해커톤에 참여하는 개발자들 역시 경험이 아직은 일천한, 현실적인 방법론의 폭이 상당히 좁은 편에 속하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좁은 경험에 의존한 구현 가능한 방법론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정작 집중해야 하는 사용자의 문제해결보다 실현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비교적 밋밋한 결과물이 나오기 십상이다.
오해는 마시라, 팀 작업 자체의 무용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팀 작업 형태별 특성을 감안해서 근본적인 한계를 경계하면서 참여하란 이야기다. 적어도 팀 작업은 주제를 세련되게 다듬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여러 조직원이 함께하는 협업의 경험을 얻기에도 충분하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은 협업을 해봤다는 노력점수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제대로 된 UX업무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한 상황이기에 각 팀 형태별 리스크를 먼저 상기시켜 줬다는 걸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자, 그렇다면 과연 가설은 어떻게 세우면 좋을까? 팀 작업을 통한 집단지성을 기대하기도 힘들다면 탈출구가 없는 것일까? 기억해라, 답은 언제나 문제 주변에 있다. 물리적인 옆이 아니라 문제 본질의 주변을 살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수립하고자 하는 가설은 특정한 주제의 사용자들이 겪는 일종의 문제점 Pain-Point의 정의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실험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는 일종의 추측으로 아직은 근거를 통해 증명하지 못한 주관적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중에 ‘과학을 보다 BODA’라는 채널이 있는데, 이 콘텐츠에서 가장 관심 있게 보는 부분은 사회자가 가정으로 질문(가설)을 던지면(’ 우주에서 방귀 냄새가 날까?’ 같은 굉장히 어처구니없지만 매우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다) 패널로 참석한 여러 과학자(교수님)들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풀어내는 일종의 사고실험(검증)이다. 질문을 접한 답변자의 반응을 보면 대부분 ‘이런 접근도 가능하구나, 이런 식의 생각도 있을 수 있구나’ 같은 감탄으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질문(가설)이 흥미롭다는, 다시 말해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설은 여기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흥미롭지 않은, 설득력이 없는 가설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구하기 어려운 팀을 어떻게 조직할지 보다,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생각한 가설을 주변인들에게 많이 들려줘 봤으면 한다. 그 대상은 친구여도 상관없고 가족이어도 상관없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대화해 보고 그들이 흥미롭게 받아들이는, 설득력이 있다고 동의하는 가설은 대개 실패하지 않는 가설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을 연습시킬 때 장표를 하나하나 읽지 말고 프로젝트를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는지를 되짚어 보라고 주문하곤 한다. UX는 지극히 논리적인 사고의 연속이며, 개연성을 무기로 한 연속적인 스토리텔링에 가깝다. 그러니 전문적인 분석법이나 여러 방법론을 고민하기에 앞서 먼저 내 가설이 말이 되는지부터 점검해 보라. 그럼 최소한 실패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그럴싸한 가설을 고민한 뒤에는? 다음은 증명할 차례다. 세상의 모든 주장은 객관적인 근거로 증명되기 전에는 개인의 주관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탐정을 생각해 보자.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
누군가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탐정의 손 끝을 청중이 응시한다. 물론 그 손끝을 마주한 용의자는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칠 것이다.
“이건 모함이에요! 난 결백하다고요!”
여기서 대부분의 소설이나 드라마는 굉장히 과학적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객관적인 증거를 설명하고 나면 용의자는 눈물을 흘리며 수갑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결말이 나곤 한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던 탐정이 ‘그냥 제 생각이 그래요'라고 대답한다면 어찌 될까? 그 탐정은 당장 무고죄로 곤욕을 치르지 않더라도 다시는 그에게 의뢰하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그의 주장은 아무련 설득력이 없으니까.
가설 검증은 추리와도 같다. 가설을 세우는 건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지만 객관적인 증거로 뒷받침이 된다면 그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쉽게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찾아 제시하는 것 그것이 가설 검증이고 우리가 보통 포트폴리오 표지 바로 뒷장에 따라오는 데스크 리서치 Desk Research는 이 가설 수립부터 검증 까지를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영리한 친구들은 이제 눈치챘겠지만 여기에는 또다시 난관이 기다린다.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과학적인 근거란 대체 뭐란 말인가? 내 가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를 아무리 열심히 적어봐야 그것 또한 개인의 주장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무슨 소용일까? 이쯤에서 애당초 검증이 너무나 쉬운, 아니면 검증이 필요 없는 그런 가설을 선택하는 역선택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는 엄청난 악수가 될 수밖에 없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검증이 너무나 쉽거나 검증이 필요 없는 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시 말해 상식이란 소리나 다름이 없으니 말다. 그러니 검증을 두려워한 나머지 너무 쉬운 가설을 세우고 시작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설이 말이 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검증도 몇 가지 규칙만 알고 있다면 어렵지 않으니까.
저자 aiden의 UXUI 포트폴리오 온라인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