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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den Jul 29. 2024

#01. 네가 감히 나를 탐해?

육아휴직의 계기

철없던 시절 초등학교에서 반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고 굉장히 속상한 일이 있었다. 내게 관심을 표한 여자아이 때문이었는데, 내가 지나치게 자존감이 높거나 건방졌던 이유가 결코 아니다. 그 아이는 소위 말하는 문제아로 평판이 좋지 않았던 데다 어른인 선생님에게조차 무례했던 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못생겼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내가 멀리하는, 아니 구체적으로는 싫어하는 이에게 고백받았을 때 상당히 불쾌했던 경험이 있었더랬는데, 나이 마흔이 넘어 번듯한 대기업에서 이런 일을 또 당할 줄은 누가 알았겠나.


불륜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직개편의 이야기다. 여기서 잠깐 자기 자랑을 해야겠지만 필자는 인사평가도 매우 좋았고, 올 초에는 시무식에서 올해의 OO상도 받을 만큼 실적도 좋은 직원이었다. 그래서 조직 내에서도 소위 말하는 '에이스'로 불렸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견뎌낸 고된 시간들이 숨겨져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내게 24년 7월 위기가 찾아왔다. 지금까지 헌신한 부서를 떠나 같은 본부 내의 다른 부서로 가라는 윗선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이동이야 조직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기도 하고, 대기업은 더욱 그게 빈번하니 크게 대수로울 일은 아니었지만 이동 자체보다는 그 배경이 나를 힘들게 했다.


우리 부서는 꽤 안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으로 평가가 나 있었고, 새로 발령받을 부서는 그렇지 못했다. 부장님은 내게 인사이동의 배경을 언급하시며 전무님의 지시가 있었음을 직접 전달해 주었다.


"지금 우리 본부가 매우 중요한 시기라서, 더 힘들어지기 전에 업무체계도 바로잡고 정상화시키는 구원투수로 보내라는 전무님 결정이다."


속으론 기가 막혔다, 여태 고생해서 우리 부서를 그래도 '일 좀 하는' 부서로 궤도에 올려놓기까지 내 정신을 갉아먹는 공황장애/우울증과 싸워가며 온몸으로 버텨왔는데.. 이제 조금 버틸만하니 이 짓거리를 다시 하라는 게 말이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집에 있는 처자식 생각이 떠오르면서 내가 이걸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대뜸 반발할 수도 없는 노릇, 서둘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앞으로 가게 될 부서의 부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구체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개판나 있는 부서의 수장답게 상황을 타개할 계책은커녕 기본적인 전략 방향도 고민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저 밉상스러운 얼굴로 사람 속을 긁어놓을 뿐이었다.


"우리 부서에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OO님 우리 부서 달라고 전무님한테 요청한 거예요."


나는 속으로 악다구니를 썼다.


'네가 감히 나를 탐해?'


지금까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그래도 쉬어갈 시간이 생기겠거니 라는 마음으로 버텨온 세월과 늘어난 정신과 약봉지를 쳐다보다 못내 나는 현재의 부장님께 면담을 신청했다.

육아휴직을 떠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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