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문 글지기 May 19. 2024

늘리기보다는 줄이기

60세 이후는 늘려가는 것보다는 줄여갈 것이 더 많다.

집안을 둘러보면 지나온 시간을 말해주는 것이 참 많다. 계절이 바뀌면서 옷장의 옷이 다시 여름옷으로 바뀌었다. 아내가 겨울옷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서랍장에 넣었다. 그중에는 작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 옷걸이에 걸린 이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도 있다.

     

분명 그 옷을 살 때는 기대했었고, 한때는 부지런히 입기도 했었다. 그런데 시대의 유행이 지났는지, 내 마음의 옷에 대한 애정이 식었는지 선 듯 손이 가지 않아서 겨우내 옷걸이만 지키다 다시 옷장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된 것이다. 입지 않을 옷은 버리는 게 낫다고 하는데 추억이 남아 있는 동안은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

     

책장에도 마찬가지다. 40년이 지난 책부터 지난주에 내 손에 들어온 책까지 수백 권의 책이 다양하게 책장을 채우고 있다. 책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속설을 믿어서는 아니지만 가장 버리기 아까운 것이 책이다. 이사를 자주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버린 책도 적지 않은데, 아직 책장에는 책이 가득하다. 제자리에 꽂히지 못하고 책 위에 겹쳐서 놓여 있는 책도 있다. 

    

책은 버리기가 정말 어렵다. 40년 전에 직장에서의 필요성에 의하여 샀던 책을 지난주에 다시 읽었다. 표지 색이 바래고, 속지는 무척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데 내용의 무게는 여전하였다. 중간중간에 예시로 든 내용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요즈음의 자기계발서와 비교하여도 뒤지지 않는 책이었다.

      

책은 한 번 읽었다고 하여 모든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다. 비단 나이 들어서 기억력이 감퇴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상황에 따라 유독 집중되는 부분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을 때 밑줄의 의미는 이제는 새롭지 않고, 귀퉁이의 한 문장에 오래 눈길이 가기도 한다. 볼 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가득한 책을 어떻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중장년 대상의 강의를 앞두고 있다. 한 번에 3시간씩 네 번의 강의를 할 예정이다. 강의자료를 파워포인트로 만들었는데 내용이 제법 많다. 그런데 강의 준비를 위하여 자료를 볼 때마다 새롭게 넣고 싶은 내용이 발견된다. 여기에 이 말을 더해주면 좋을 것 같고, 이 자료를 추가하면 이해도가 높아질 것 같아서 등등 이유도 많다.     

하지만 줄여야 한다. 그림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선과 색이 가진 아름다움과 더불어 여백이 주는 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강의만으로 청중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다. 설명을 줄이고 직접 보여주는 것도 줄여서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자료의 여백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할 거리를 찾고, 여유를 가짐으로써 애써 주려고 하지 않아도 더 큰 것을 얻어갈 것이다.

     

줄이지 말아야 할 것은 있다. 강의를 위한 준비의 시간은 아무리 많이 투자하여도 결코 만족할 수준으로 강의를 끝낼 수는 없다. 여러 번 반복하여 연습하고, 또 연습하여도 상황에 따라 놓친 것은 분명히 생긴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설명 시간은 줄이더라도, 마치고 나서 아쉬움이 적게 남도록 준비 시간은 줄이지 말자. 내용을 버리고 시간을 줄이더라도 웃으며 마무리할 수 있도록 여백과 여유를 준비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연지원에서 차 한 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