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문 글지기 Nov 03. 2024

아는 것이 우환(憂患)이 되지 않도록

나를 가꾸고 다듬는 일은 게을리할 수 없다.

퇴직 후의 일상이 매우 단조롭다. 평일과 휴일의 차이도 없다. 단지, 하는 일 없이 지내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찾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드물다. 일하면서 지켰던 하루의 루틴을 잃지 않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잡는다. 아침 독서는 제법 습관화되어 읽은 책의 수가 늘어가고 있지만, 독서의 마지막 단계인 ‘내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일상의 작은 목표를 정하려고, 오랜 꿈인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출간하기’ 위한 강의를 신청하였다. 일주일에 두 시간의 강의만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져서,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유튜브에서 비슷한 제목의 강의도 찾아서 보았다. 결론은 오히려 자신감의 저하로 나타나고 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이런 때에도 쓰일 수 있으려나.

     

어느 교수님의 강의에서는 ‘군자’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필을 쓰라고 하신다. 후학들이 본받을 만한 학식과 덕망을 쌓은 후에 글을 남기라고 하신다. 그분의 기준이 너무 엄격한 것인가.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독자들을 위한 표현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공감을 얻으려면 인격을 갖춤이 중요하지만, 다양한 표현력이 일부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집일과 교정일을 오랜 기간 해온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런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일단 쓰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는 하지만, 글이란 독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한 번 출간되면 계속 남는다. 첫 작품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잘 나갈 가능성은 희박하더라도 쉽게 덤벼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나는 어떤 책인가’를 주제로 시작된 책 쓰기 강의에서 마지막 단계인 출판기획안 작성 및 발표를 앞두고 있다. 수업을 시작할 때만 하여도, 20여 년을 편집 일에 종사하신 분의 피드백을 받아본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가 가진 제재와 글쓰기 계획이 전문가의 시각으로 어떻게 평가받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하는 안일한 낙관론도 없지 않았다.

     

낙관론이 비관적으로 되는 시간은 짧았다. 병행하여 수강한 ‘에세이 쓰기’ 강의에서는 더 많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글은 독자에게 정보 또는 공감을 주거나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쓰려고 했던 부분은 이 중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일단은 앞서 경험한 것을 알려주는 ‘정보’라고 애써 정의해 본다. 그런데 어떤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일까? 

    

일 속의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무엇이 남았을까? 일단 논리적인 면과 설득력은 향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다양한 표현력의 부분에서는 퇴보한 부분이 없지 않다. 간결한 표현이라고 여겨 쓴 글은 한자어가 많아진 것에 불과하며, ‘재미’보다는 무미건조한 글쓰기에 익숙해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감성적인 부분의 글과 유사한 단어들을 찾아보자. 

    

그리고 일단 쓰자. 헤밍웨이의 말처럼 ‘초고는 걸레’이더라도, 많은 초고속에서 퇴고를 거듭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좋은 글을 보면서 다듬다 보면 조금씩 내 마음에 드는 글도 늘어가겠지. 내 글의 첫 독자는 ‘나’ 자신이라고 한다. 퇴직 후의 많아진 시간을 활용하여 ‘다상량’과 ‘다독’부터 실천하면서 나와 나의 글을 다듬어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있으면서 다시 보는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