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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문 글지기 May 12. 2024

연지원에서 차 한 잔

등 달고 나서 마시는 차향이 오래 남는다.

올해는 미루다 보니 연등을 다는 것이 너무 늦었다. 연초에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연등을 달곤 했었는데, 올해는 초파일을 며칠 앞두고 절을 찾게 되었다. 종교 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1년 등을 다는 것은 늦게나마 잊지는 않았다.

     

늦게 연등을 달려고 하다 보니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내에는 이미 달 수가 없고, 누각 밑에 동지까지 다는 자리만 남아 있었다. 장소가 무슨 문제나 되려나 싶어서 가족 이름을 쓰고 건강 발원을 담은 글을 쓰고 나서 미리 준비된 연등에 달았다. 조그만 연등 속에 조그만 전구가 들어 있어서 계속 밝혀 준다고 한다. 사회 변화에 맞추어 여기도 많이 변했다. 

    

대웅전 앞에는 행사를 위한 연등이 이미 줄을 지어 달려 있었다. 오후부터 미가 예보되어 있는데, 야외 공간에 있는 연등이 조금 걱정되었다. 물론 여기도 기상 예보는 볼 것이고, 야외 행사를 위한 대비도 해 두었겠지만 준비한 사람들의 노고가 제대로 빛나게 되기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원한다. 

    


법당 앞에는 작약이 곱게 피었다. 제철을 맞아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이 연등과 잘 어울린다. 연꽃은 아직 철이 일러서 피지 않았는데 연등으로 피어났고, 그 대신 작약과 불두화 등 다른 꽃들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고운 빛깔에 잠시 마음과 시선을 준다.

     

대웅전과 주위의 법당을 둘러보았다. 잘 정돈되고 마당은 빗질이 곱게 되어 있었다. 새벽부터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분주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산사가 정돈되고 건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조용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대웅전을 비롯한 법당 내부에는 열심히 절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절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은 항상 연지원으로 향한다. 다행히 붐비지 않았다. 아내와 절을 찾을 때면 늘 연지원에 들러서 차를 마시곤 한다. 나는 쌍화차, 아내는 대추차. 연꿀빵과 편강을 곁들여서 한 평 남짓의 조그만 방에서 차를 음미하였다.

     

바깥 부엌에는 쌍화차와 대추차가 솥에서 끓고 있었다. 연료는 가스로 바뀌었지만 직접 재료를 달여서 차를 준비하는 절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나 보다. 시간의 조급함이 전혀 없이 차를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 좋고, 초가지붕의 부엌에서 끓고 있는 차는 운치를 더해준다.

     

여기 온 목적이 연등을 달기 위함이었는지 차를 마시기 위함이었는지 이미 잊었다. 사실 구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오월의 어느 순간을 산사의 찻집에서 즐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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