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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닭 Apr 17. 2023

어른

조건이 아닌 과정으로

마법의 주문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른이 되면 학원 숙제도 안 할 테니"

  "아기는 어떻게 생겨요?"

  "왜 엄마는 되고 나는 안돼?"

  "나도 TV 마음대로 볼래"

  "용돈 조금만 더 올려주면 안 돼?"


  어릴 적, 친구들과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마법의 주문이 있었다. 바로 '어른이 되면'이다. 이 주문을 외면, 친구들은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현실의 고통을 덜었다. 어른이 되면 지긋지긋한 학원에서 벗어나고,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할 수 있으리라 꿈꿨다. 반면 어른들은 주문을 사용해 칭얼대는 아이들의 입을 쉽게 다물게 하곤 했다. 주문을 들은 친구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억울하지만 사실이었고, 당장 나이를 먹을 수도 없으니 더 억울했으리라.

  나는 '어른'이 마법의 주문이 되는 게 신기했다. 나에게는 '어른'이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늦게 학원에 시달리며 컸어도, 소소하게 즐거운 일은 항상 있었기에 탈출구를 찾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학교부터는 '어른'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내가 당장 저 '어른'의 역할이 된다면 잘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요'였다.

  어른들은 정말 크게 느껴졌다. 단순히 키가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만들어둔 체계와 흐름이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명절날 어른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만든 분위기, 초중고로 이어지는 교육체계, 직업을 가져 생계를 꾸려가는 것 등. 지금의 어른들과 그들의 조상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기틀에 압도당했다. 나는 나의 부족한 점을 너무나 알고 있었고, 결국엔 나에게도 '어른'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미래가 찾아올 것을 알았기에 경계하고 대비했다. '어른'이 무엇인지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은 채.



어른이 된다는 게



받아쓰길 잘하는 게
더 이상 자랑이 아니게 되고
키는 한참 더 자랐는데
자랑할 일은 사라져 가네

차를 타고 달릴 때면
날 따라오던 별들도 이젠 빛나질 않고
키는 한참 자랐는데
왜 하늘은 점점 높게만 느껴지는지?

사람들은 날 어른이라 하는데
나 아닌 것들만 점점 더 늘어가
모두들 날 보고 다 컸다 하는데
왜 나는 자꾸만 작아져만 가는지?

- 김나영, 「어른이 된다는 게」, 2017


  20살. 어느새 나도 법적으로 인정받는 어른의 나이가 되었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새롭게 시작한 아르바이트와, 당당히 민증을 들고 간 술집도 어른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어른들을 더 관찰하게 되었다. 바로 대학 선배들이다. 나이는 1살 차이지만, 사소한 것에도 멋져 보이고 듬직해 보인다. 와 저게 어른인가? 1년만 지나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앗 하는 순간 시간이 흘러 2학년이 되었다. 나는 내가 동경하던 선배의 나이가 되었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새내기들이 들어오는 게 정말 신기했지만, 나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커 보였던 선배의 모습도, 그렇게 엄청난 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뭐지?

  사회는 나의 나이가 만 19세로 넘어가는 순간 나를 어른으로 규정했다. 주변 어른들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순간 '이제 어른이니 용돈 안 줘도 되겠네~'라고 말했다. 길을 가다 마주친 꼬마아이는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회원가입을 할 때 보호자의 정보가 필요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동기들은 아직 자신이 어른이 되기는 멀었다고 말한다. 부모님과 어르신들은 나를 여전히 아이 취급 하신다. 아이들이 말하는 '어른'은 '나이'로 정해지는데, 어른들이 말하는 '어른'은 다른 소양을 요구한다. '어른'이란 말은 나이 이상의 이상적인 개념들을 품고 있었다.

  관점에 따라 어른의 정의가 달라진다면, 과연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무엇인가?

   


어른의 조건


책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른의 조건은 '책임'이다. 아이는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실수를 했을 때 어른이 대신 책임을 진다. 그러나 어른은 자유를 얻은 대가로 더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젤리를 왕창 사는 것은 즐겁지만, 젤리를 사기 위한 돈은 직접 벌어야 했다. 학원 숙제 대신 생긴 업무를 하지 않는 것은 자유나,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연봉보다 비싼 차를 사는 건 자유지만 월급보다 비싼 대출 이자를 감당하는 건 자신의 몫이다. 선택의 순간은 짜릿하지만,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을 피해서는 안된다.

  경제적인 부분을 떠나서도 책임질 것이 있다. 자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 또한 책임이다. 나의 장점과 단점을 바르게 알고 사랑해야 하고, '나'라는 애완동물을 기르듯 아껴줘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쉽게 남 핑계를 대는 것은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다. 남 탓에 익숙해진다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습관적 남 탓은 성숙한 어른의 방어기제가 아니다.

  선택과 책임을 감당하는 연습을 한 아이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성숙하게 된다.


여유


  다음으로 중요한 조건은 '여유'다. 스스로가 일궈낸 경제적, 심리적 책임감을 딛고 확신을 얻었다면, 그로 인한 여유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만족할 줄 모르고 물질적인 것에만 매몰되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위해 주변에 피해를 주게 된다.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효율적 일지 모르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 남이 얻을 피해를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경제적 여유로 생긴 넉넉함으로 주변인들과 따뜻한 교우관계를 만들거나, 기부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이다. 

  이처럼 어른으로서 성숙하기 위해선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남을 돌아볼 여유가 있어야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나'라는 사람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남'이라는 조각칼도 필요하다. 자신이 항상 옳다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은 성숙한 어른으로 보지 않는다.

  자신만큼이나 남을 소중히 하는 아이는, 본받고 싶은 매력을 가진 매력적인 어른으로 성숙하게 된다.



어른이 되는 과정



  어른이 되는 조건을 간단히 적었지만, 사실 '조건'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어른'이란 말은 이상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일종의 지향점에 불과하고, 조건을 달성하는 순간 짠하고 멋진 어른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임과 여유를 가지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충분히 멋지게 자라나고 있다.

  달라진 것 없다고 생각했던 대학교 2학년에는, 같은 캠프에 참여한 후배의 감사 인사로부터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을 어림 짐작하여 들어주고 조언할 줄 알게 되었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맛난 밥 한 끼를 대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달라진 나의 모습 덕에 새롭게 사귄 사람들과는, 이전과 또 다른 따뜻함을 나누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게 어렸을 적 고민했던 것만큼 무시무시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사랑받는 아이로 남아있고 싶지만, 어린 마음은 소중히 기억해 둔 채 어른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키는 멈췄어도 성장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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