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라는 말 대신, "애정한다"라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는가? 적어도 나는 "애정해", "애정한다", "애정하는"등 '애정'이 들어간 말을 소리로 들은 적이 드물다. 때문에 나에게 '애정'이란 말은, 구어(口語) 보다는 문어(文語)로 익숙하고, 특히 많이 접했던 연관어로는 '애정결핍'이 있다. 그래서인지 '애정'이란 말을 접하면, 사랑스러운 따뜻함 보다는, 애달픈 결핍이 은근하게 느껴진다.
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사랑으로 자신을 충족시킬 수 없을 때,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애정을 갈구한다. 그것은 성취를 인정받는 형태일 수도, 보살핌을 바라는 관심의 형태일 수도, 나의 최소한의 가치를 보장받길 원하는 존중의 형태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결핍은 자존감에 반비례한다. 사람의 자존감이 요동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나 역시도 최근에 떨어진 자존감만큼 커다란 결핍을 느꼈다. 시간이 흐르며 다시금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이전에 겪지 못했던 새로운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애정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든 것이다.
초록을 담은
나는 초록을 담은 작은 화분 하나가 필요해 ooh ooh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ooh ooh [중략] 눈에 잘 띄는 곳에 너를 두고 사랑을 줄 거야 ooh ooh 네가 자라는 만큼 나의 맘도 채워지는 거야 wow wow
- 김세정, 「화분」, 2020
'애정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애정을 받고 싶다'라고 갈구할 때만큼, 충동적이고 강렬했다. 수동적으로 애정을 갈구하는데 익숙했던 나는, 애정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 느껴 당황스러웠다. 나의 애정을 받아줄 대상이 필요해졌다.
사람? 아니, 사람에게 당장 애정을 쏟기에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동물? 내가 없는 동안에 혼자 두면 외로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식물은? 좋다, 식물로 정하자. 무언가를 기른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져서 잘 도전하지 않은 분야다. 그래서 나의 서툰 손길로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식물을 찾아야 했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물을 많이 주지 않아도 괜찮은 식물. 음 이왕이면 벌레도 꼬이지 않고, 겸사겸사 공기정화도 되면 좋겠다. 위의 내용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더니, '조화'나 사라는 댓글이 달렸다. 오, 이런 애정을 주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책임감은 회피하려고 했구나. 정신 차리자.
퇴근한 나는, 근처 식물가게로 찾아갔다. 고민 없이 골라둔 스킨답서스를 바로 결제한 후, 옆구리에 화분 하나를 끼고 집에 돌아왔다. 신기했다. 매번 가방만 들고 다니던 손에 화분이 들려있고, 집에서도 화분과 함께할 거란 것이. 이름을 정해주는 건 어떨까?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딱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애정'이로 하자. 칙칙한 방 안에서 홀로 초록을 담은 애정이를 보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든다.
애정이를 키운다는 것에 잔뜩 긴장했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애정이는 저 혼자 잘 자랐다. 최근 연휴가 많았던 터라 집을 자주 비웠는데, 돌아와서 애정이를 보면 무섭게 자라고 있었다. 어..? 어? 식물이란 게 원래 이렇게 잘 자라는 것인가? 첫 연휴 동안 연한 녹색으로 돌돌 말린 잎이 새로 자라기 시작하면, 다음 연휴가 지난 후에는 활짝 펴져서 나를 맞이한다. 나는 애정을 준다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과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구나. 내가 모든 걸 책임지지 않아도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들도 많은데.
느릿 듯, 그러나 서서히 자라는 애정이를 보면 불안했던 내 마음도 부드럽게 가다듬어진다. 여러모로 고마운 애정이다.
날것을 담은
애정이를 기르며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원래 나의 관심과 애정으로 상대를 변하게 하는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자연스레 봉사활동에 관심이 갔다. 오랜만에 자원봉사 포털에 접속해 보니, 눈에 띄는 기록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봉사시간 때문에 시작했으나, 결국 시간과 상관없이 계속했었던 봉사활동. 바로 공부방 봉사활동이었다. 내가 관심과 애정을 주는 만큼,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아이들의 모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주말마다 근처 지역 아동센터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봉사활동은 초등학교 1~6학년을 대상으로 했는데, 주말은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아이들과 놀며 시간을 보내는 활동이 이루어졌다. 저학년 아이 하나와 보드게임을 시작하니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도블'이라는 순발력이 필요한 게임을 했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6학년 여자아이 하나가 내 패를 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 이거 있잖아요! 아 진짜 답답해! 아아악! 기억력 왜 이래요?!" 대신 게임에 참여하겠냐고 물어보면, 입을 꾹 닫고 먼 산을 본다. 그러고는 다시 내 패를 보며 답답함을 토해낸다. 아이의 말에 전혀 타격은 없었다. 다만 그저 귀여워 웃음이 나오고, 아이가 원하는 애정과, 품고 있는 결핍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품어본 결핍만큼, 상대의 결핍도 헤아리기 마련이다. 내가 느껴본 결핍과, 아이가 안고 있는 결핍의 종류가 같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결핍을 안고 살아온 세월은, 상대의 결핍을 차분히 살펴볼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센터에서 본 아이들이 더욱 사랑스럽고, 그들에게 애정을 주고 싶어졌다. 조금만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커다랗게 X표시를 하는 1학년 아이도, 자신 있는 게임에는 우쭐하면서 사람을 대하기는 어려워하는 2학년 아이도, 축구를 하며 욕을 내뱉다가도 저 잘했죠? 하며 인정을 바라는 5학년 아이도, 투덜거리면서도 게임하는 사람들 옆을 떠나지 않는 6학년 아이도, 모두 애정을 갈구하는 날것 그대로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정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고, 애정을 주길 원하는 내가 있으니 서로가 서로를 바라는 셈이다. 앞으로의 봉사활동으로 아이들이 변해갈 모습이 기대가 되어서 설레게 된다.
나를 담기를
무언가를 애정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결핍도 함께 드러내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애정하는 대상으로부터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기에, 부족한 부분을 어떤 식으로든 채우고자 하는 건 당연한 욕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애정을 주고 싶다고 표현한 이 글도 나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명확한 대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 자체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진한 애정결핍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단순히 애정을 받고 싶기만 한건 아니란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애정을 받든, 주든, 단지 '애정'이라는 마음 자체를 느끼고 싶었나 보다. 보다 능동적으로 감정을 주고받길 원하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고 대견하게 느껴진다.
그러는 한편으로 나에 대한 긍정을 추가해서 뿌듯하다. 나아가 '애정'의 대상 속에 나를 담기를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