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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닭 Jun 25. 2023

공감

공감에 대한 집착

이해와 공감



  개인적으로 들을 때 숨이 턱 막히는 표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해가 안되네'다. 차라리 원색적인 욕설들은 말하는 사람의 인성과 품행을 문제 삼아 맞대응할 수 있지만, '이해가 안되네'는 평가의 의미가 담겨 있어 신경 쓰인다. 정말 나의 말이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내가 문제인가? 상대의 이해력이 문제인가? 하며 계속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 생각하다 보면 상대와 나의 인식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상대가 사용한 '이해'는, 내가 생각하기엔 '공감'에 가까운 것이다.

  위의 사례뿐만 아니라, 서로가 생각하는 '이해'와 '공감'이 다른 경우는 흔히 접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상대와의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이해'와 '공감'이 무엇인지 정립하기 시작했다. 나는 상대가 말한 사건의 논리구조를 납득할 수 있으면 '이해'라고 한다. 가령, 누군가 개인적인 볼일이 생겨 지각을 했다면, 나는 지각한 상대에게 '이해해'라고 말할 수 있다. '볼 일이 있으면 미리 준비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도 있지만, '이해'의 여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나는 그저, '개인적인 볼일'이라는 원인이 만들어낼 무수한 결과 중에서, '지각' 존재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납득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의 의미는 정립하기 어렵다. 가상의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자. A가 B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상황이다. A의 연인은 약속시간에 크게 늦었고, 약속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A는 크게 화를 냈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B는 그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치며 함께 연인의 욕을 했다. 이어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인은 중요한 일이 끝나지 않아 늦었다고 말했고, A는 연인의 말을 변명으로 여기며 다퉜다고 한다. B는 연인이 늦은 이유가 꽤나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A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A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맞장구를 쳤다.

  나의 기준으로, B가 A에게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친 건 '공감'이다. B자신도 A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동의했기 때문이다. 연인이 늦은 이유가 합당하다고 생각한 건 '이해'다. B가 느낀 감정이 A와 같진 않지만, 연인이 늦을 수밖에 없는 물리적인 상황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까진 쉽다. 그러나 마지막 상황을 생각하다 보면, '공감'의 의미를 정립하는데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A의 기분을 상하게 싶지 않아 한 맞장구는 정말 공감인가? A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니 공감도 한 것인가? 공감한다는 게 뭐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공감?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공감의 의미를 정하기 위해 내가 어떤 것들을 '공감'이라고 느꼈는지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를 되돌아보면서, 나는 내가 공감을 많이 해본 적이 없단 걸 깨달았다. 공감한 경험이 적으니 공감의 의미를 정하는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같은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같은 단순한 생각으로 공감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본래 남들에게 관심이 적은 나였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내가 '공감'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나의 비슷한 마음에 대입하기'였다. 만약 상대가 어떠한 이유로든 커다란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나는 내가 가장 '괴로움'을 느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상대의 마음에 동조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연습이 계속되다 보니, 나는 어느새 공감을 잘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상대의 '괴로움'과 나의 '괴로움'은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의 마음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에서 끌어올린 감정을 상대와 비슷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 기만처럼 느껴졌다. 즉, 공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공감 코스프레로 인한 부작용은 컸다. 상대의 마음보다 나의 비슷한 마음을 찾기에 급급하다 보니, 상대의 마음에 온전히 집중하는 건 힘들어졌다. 상대에게 질문을 하는 건 공감을 못해주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말없이 상대의 마음을 지레 짐작하는 습관이 들었다. 내 멋대로 상대의 마음을 단정해버리니, 상대에 대해 궁금한 것도 없고,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힘들어졌다. 궁금증이 없다는 건 관심도 없어지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공감을 하면 할수록 공감이 힘들어졌다. 나는 왜 상대와 비슷한 경험을 하지도 못했으면서 공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제대로 된 공감이 맞나? 공감도 지능이라던데, 지능이 떨어져서 잘 못하고 있는 건가? 공감?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공감에 대한 집착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때론 전혀 다른 형태로 찾아오기도 한다.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공감에 대한 생각이 길어지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하자,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에겐 공감의 의미와 방법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집중해야 할 것은, 내가 '공감'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였다. 사실 공감에 대한 거창한 정의는 필요 없다. 그저 상대의 마음과 감정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위에 서술한 정도로 공감에 집착하지 않는데, 나는 공감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으나, 소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소통에 자신감이 없어 말실수를 할까 두려웠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상대가 먼저 표현한 마음에 동조하는 것이 편하고 안전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공감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하고 있는 공감이 공감 코스프레인 것을 알기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커져갔다. 공감 코스프레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감'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집착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공감'을 하고 싶은 마음 보다,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공감'을 사용했기 때문에 공감을 할수록 지쳐간 것이다. 과한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나와 남 모두 해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마무리하며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의 방향은, '공감'에 대한 사람들마다 의미가 달라서 생기는 문제와,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 무엇인지 나의 생각을 적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생각을 정리하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덩달아 오랜 기간 나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어서 후련했다. 하루 하루의 깨달음으로 더 나아진 나는 새롭고 건강하게 공감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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