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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연 Sep 06. 2022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속 정치 이야기

정치와 함께 보는 경종, 연잉군 노선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조선의 20대 왕 경종(景宗, 1688~1724)의 재위기간(1720∼1724) 에 있었던 일을 극화한 작품이다.


극은 연잉군(延仍君, 경종의 뒤를 이어 재위하는 영조) 이 왕세제로 책봉되어 첫 공식 일정에 나서는 날로부터 시작된다. 경종은 자객이 자신을 습격하는 악몽을 꾸고 깨어나, 유일한 친구이자 벗이자 스승인 홍 수찬(修撰,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의 정6품 관직)에게 이를 이야기한다.


수찬 관직을 맡아 경종의 곁을 지키는 등장인물, 홍주형은 실존인물이 아닌 가상인물이다. 실제로는 목호룡을 모티브로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목호룡은 극 중 이루어지는 고변을 실제로 한 인물이며 경종의 벗이자 스승은 아니라고 한다.


경종은 연잉군에게 어릴 적 좋아하지 않았느냐며 타락죽을 내리려 하지만, 연잉군은 어릴 때 일이라며 거절한다. 또한 연잉군은 홍 수찬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경종은 또다시 악몽을 꾸고, 그 꿈 속에서 이번에는 선대 왕 숙종을 보게 된다. 피묻은 장검을 들고 나타나 동생만도 못한 놈이라며 일갈하는 숙종에게 제 어미도 죽이셨죠, 하고 대들던 경종은 꿈에서 깨어난다. 세제 연잉군과 양전사업에 대해 한창 논의하던 중 까무룩 오수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연잉군을 물린 경종은 홍 수찬마저 경계하기 시작한다.


홍 수찬은 퇴궐하던 도중 자신을 기다려 경고하는 연잉군으로 인해 과거를 회상한다. 홍 수찬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있어야 할 자리, 지켜야 할 본분'을 벗어난 대가로 유배를 갔다가 사약을 받았다. 당시 세자의 스승이던 홍주형에게 아버지는 '소명'을 강조하고, 홍주형은 경종에게 마지막 수업이라며 "성군이 되어 저와 제 아비의 원통함을 풀어주십시오, 그것이 전하의 소명입니다" 라고 큰절했었다.


이 때 홍주형의 과거와 교차되는 경종 이윤과 연잉군 이금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동생을 위해 이것저것 가지고 온 이윤에게 해맑은 동생 이금은 홍주형도 불렀냐며 싫은 기색을 비친다. 어린 이금은 "세자가 되지 못한 왕자는 죽는 거랬어요, 우리 어머니가요" 라며 홍주형에게는 "죄인의 자식 주제에 감히!" 라는 말을 한다.


함께 잠행을 나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경종은 너의 국사 참정을 허락하여 당파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연잉군은 당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며 이용해야 한다고 맞서고 둘은 대립하게 된다.


연잉군은 경종에게 "걸핏하면 잠꼬대 해서 신하들에게 업신여김 당하는 왕보다는 아바마마처럼 강력한 왕이 훨씬 낫지요." 라는 말을 해 경종이 "너 정말 아바마마를 쏙 빼닮았구나!" 라고 분노하게 만든다.

경종은 연잉군에게 "이토록 나의 진심을 호도하다니, 기어이 노론의 꼭두각시를 선택하는 게냐?" 라고 묻는다. 연잉군은 "형님(혹은 전하)!" 라며 언성을 높였다가,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물러가려 한다.


이에 경종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허한다. 이는 경종이 오랫동안 갈아온 칼로, 모든 신하들과 연잉군까지 조아려 명을 거두어달라 청한다. 왕과 세제의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죄로 노론 4대신은 유배형을 받는다.


한편 홍 수찬은 노론이 주상을 해하려 독살을 꾀했다는 증거를 잡지만, 역적을 고변하기 전에 서가에 불을 내고 그 틈을 타 찾아온 자객에게 죽음을 맞는다.


홍 수찬의 고변서를 읽은 경종은 절대군주의 위엄을 보이기로 한다. 신하들은 연잉군을 폐세자하고 사약을 내리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경종은 연잉군을 보호하기 위해 버틴다.


연잉군은 노론으로부터 왕을 독살하라는 재촉을 받고, 인조반정 때 떴다는 하얀 무지개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시간이라며 결심한다.


한편 경종은 겨우 잡은 왕관을 이리 빼앗기려 하냐며 자신을 책망하고, 역사에 남을 성군이 되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꿈 속에서 듣는다. 이는 독에 중독되어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꾸는 꿈이었다. 그리고 경종은 진정한 왕이 되어 영원한 꿈을 꾸시라 말하는 홍 수찬의 큰절을 받는다. 홍 수찬은 자네가 죽는 꿈을 꾸었다는 경종에게 제가 보이신다면 이것 또한 꿈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병환으로 앓아누운 경종에게 부자인삼차를 몸소 가지고 와 올리며 연잉군은 "이 잔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라며 역모를 고한다. 노론에게 강요되었다는 것을 안 경종은 이 죄인을 놓으시라며 애원하는 연잉군을 지키고, 이름이 아닌 뜻을 남기고, 업적이 아닌 마음을 남기기 위해 독이 든 부자인삼차를 들이킨다.


이후 영조가 왕위에 올라 경종의 시호를 붙이고, 홍 수찬의 모습을 한 이가 사초를 물에 씻어 흘려보내려다가 그대로 간직하는 장면으로 극은 끝난다.



경종 재위 이전의 정치 구도 (숙종 재위기간)



경종은 날 때부터 정치의 한복판에 있었다.

당시 상황은 이러하였다. (남인 <-> 서인(노론+소론) 대립 시기)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서인 출신이었다.

숙종에겐 서인 세력이 바로 견제해야 할 외척인 셈이다.


명성왕후는 서인 세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고, 숙종은 첫 왕비 인경왕후(서인 출신) 를 맞이한다. 인경왕후는 숙종의 적장녀와 적차녀를 낳았다. 다만 적장녀는 1세에, 적차녀는 생후 1일만에 사망했다.


이후 숙종 즉위 6년 만에 인경왕후가 승하한다.


첫 왕비(정비) 사망 이후 3년상을 마쳐야 이후의 왕비(계비) 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 법도이지만, 서인 세력은 숙종이 다른 세력에서 왕비를 맞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또한, 숙종은 이 때 이미 희빈 장씨를 가까이하고 있었다.


희빈 장씨는 당시 남인 세력의 장렬왕후 처소에서 일하던 궁녀였다. 숙종이 정비 사망 이후 왕비 자리가 빈 틈에 희빈 장씨를 후궁으로 들이기라도 한다면, 서인 입장으로서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 세력은 정비 사망 6개월만에 명성왕후와 함께 숙종에게 계비를 맞이하도록 상소를 올린다.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숙종은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하게 된다.


또한, 이 때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당시 아직 궁녀이던 희빈 장씨를 출궁시켜 견제했다. (희빈 장씨는 명성왕후가 승하한 이후 6년 만에 재입궁했다.)


두 번째 왕비가 된 인현왕후는 좀처럼 자녀를 낳지 못했고, 서인 세력에서 간택 후궁을 들이게 된다. 노론의 영수 김수항의 증손녀, 영빈 김씨였다.


영빈 김씨는 친정에 기밀을 빼돌리다가 숙종에게 들켜 폐출되고, 이후 인현왕후 복귀 때 재입궁했다. 다만 숙종이 가까이하지 않아 자녀는 없었다. 이후, 연잉군이 생모 숙빈 최씨 사후에 영빈 김씨와 모자지간처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자기가 승하하면 다음 왕비로 영빈 김씨를 책봉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숙종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세 번째 왕비로는 인원왕후가 책봉되었다.



경종, 생후 100일 만에 원자가 되다


왕비와 후궁들 모두가 서인 세력 출신이었다. 희빈 장씨는 남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희빈 장씨가 훗날의 경종, 이윤을 낳는다. 숙종의 적장녀와 적차녀는 어릴 적 죽었고, 이윤은 첫 장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숙종은 이윤 생후 100일 만에 원자로 책봉하기로 한 것이다.


후궁 소생을 원자로 삼는다는 것은 즉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 이윤을 중전인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적장자로서 적통을 잇는다는 뜻이었다. 이 경우 나중에라도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게 되어도 그 아들은 적차자가 되고, 왕위는 계승하지 못하게 된다.


우암 송시열을 필두로 서인 세력은 당연히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 때 숙종은 송시열을 사사하고 인현왕후를 폐출하여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다.


아들 이윤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만듦으로써 이윤을 원자로, 적장자로 만든 것이다.


이는 장자의 탄생에 기뻐한 숙종의 기행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사건건 간섭하는 외척 서인 세력을 찍어내고 남인을 정계에 등용하기 위해 경종의 탄생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도 생각된다.




사족. 우암 송시열 이야기


이 때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은 노론의 우암 송시열은 키가 약 190cm 였다고 한다. 사약을 세 사발이나 마시고서야 죽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릴 적 치료 목적으로 비소를 복용한 적이 있어서 사약에 든 비소에 내성이 이미 있었단 설이 있다. 혹은 몸이 찬 체질이라 사약에 들어가는 '부자' 약재가 약으로 작용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부자' 약재가 뜨거운 성질이라 몸이 찬 사람한테는 약으로 작용하고, 관절염을 줄여준다고 한다.




숙종의 환국에 이용되는 후궁과 왕비


숙종 재위기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급격히 정권이 변화하는 환국(換局)이다. 이 환국 정치에는 후궁과 왕비들이 계속해서 이용되었다. 환국 때마다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 15년(1689)

숙종은 본인의 나이 28세에 태어난 장자 경종을 원자로 세운다. 이 때 기사환국을 통해 서인 세력을 실각시키고 송시열을 찍어냈다.



숙종은 울화증을 앓았고, 변덕이 심해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다가 때렸다고 한다. 경종 원자 책봉 당시 인현왕후를 폐위시킬 때, 버선발로 빨리 나가라고 내쫓으며 재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극 중에도 "너 아바마마를 정말 쏙 빼닮았구나!" , "선왕의 울증을 닮으신 듯하여" 하는 대사가 있다.


숙종이 울화증이나 변덕으로 후궁과 중전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치세력으로서 후궁과 중전을 이용하고 아들 또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갑술환국(甲戌換局), 숙종 20년(1694)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남인 세력이 정권을 잡았던 상황은 또다시 뒤바뀐다.


당시 왕비로 책봉된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뇌물수수 혐의를 받았는데, 4월 1일에 숙종이 스스로 죄를 청한 장희재에게 괜찮으니 정사에 임하라고 안심시켰다. 열흘 뒤인 4월 11일에 장희재를 삭탈관직하고 체포하였다.


숙종은 이 갑술환국을 통해 남인 세력을 찍어내고, 서인 중에서도 소론을 여당으로 올린다.



이 때 숙빈 최씨의 정치적인 행보가 눈에 띈다. 이맘때 숙종은 연잉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가까이하고 있었는데, "장희재가 날 독살하려 했다" 며 숙종에게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는 장희재가 돈 50냥을 숙빈 최씨의 외사촌 형부에게 주고, 외부에서 독이 든 음식을 반입해 먹이려고 했다고 하였다. 다만 이 고발은 거짓으로 판명났는데, 첫 번째로 <경종수정실록> 가사에서 나오듯 "김 상궁에게 은 500냥 주어" 라고 한다. 당시 궐에서 죽음을 사주하기에 돈 50냥은 너무 작은 액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궐에는 외부 음식 반입이 안 된다고 한다.


이 때 서인들도 노론과 소론 세력이 의견이 갈렸다고 한다.

노론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자는 입장이었다.

소론은 희빈 장씨를 그대로 왕비로 두고, 인현왕후는 폐서인된 채로 두자는 입장이었다.


이 때 숙종이 소론을 집권 여당으로 올리면서 실제로는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당시 왕비이던 장옥정을 '희빈' 으로 강등한 것이다.



* 신사환국(무고의 옥), 숙종 27년(1701)

희빈 장씨가 취선당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알려진 사건이 바로 신사환국이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한다. 이 때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 고 밀고했다.


소론은 희빈 장씨를 용서하자는 온건론을 폈지만 숙종은 희빈 장씨를 사사하고, 소론 대신들을 귀양 보내면서 노론 세력을 집권 여당으로 올린다.




폐세자의 뜻을 내비친 숙종, 약해진 경종의 왕권


숙종은 말년에 희빈 장씨가 사사된 일로, 경종이 즉위 후에 연산군처럼 될까봐 두렵다며 우려를 내비친다. 집권 세력인 노론을 불러 '세자를 폐하고 연잉군을 세자로 세워라' 는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은 노환으로 사망한다.


이 때 숙종의 뜻을 듣고, 노론은 왕의 암묵적 허가 하에 이윤을 폐세자시키기 위해 숙종에게 대리청정을 청했다. 이윤은 흠잡을 데 없이 신중하게 대리청정을 수행하였고 숙종이 갑작스런 노환으로 사망하자 즉위한다.


집권 세력인 노론은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을 세자로 세워 즉위시키려 했고, 경종은 선왕 숙종의 눈 밖에 난 채였다. 외척인 남인 세력 또한 경종을 뒷받침해줄 수 없었다. 왕권은 탄탄하지 못했다.


경종 즉위 이후, 노론은 여러가지로 왕권을 방해한다. "국왕의 어머니의 죄를 명백히 저술하라" 며 모욕한 사관 윤지술을 경종이 유배 보내려고 하자, 상소를 올려 압박해 석방하도록 한다. 반대로, 경종 즉위 후에 생모인 희빈 장씨의 명예 회복을 청한 유생 조중우를 처형하라고 상소를 올린다.


이 때 중심이 된 것이 노론의 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 4대신이었다.



연잉군, 왕세제 책봉되다


경종은 후사가 없었다. 이 때 경종의 왕비로 책봉된 선의왕후는 다른 사람을 양자로 들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기로 계획하고, 사전에 준비하여 경종의 하루 일정을 날 잡고 전부 다 취소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비게 된 하루 휴가의 끝에 노론끼리만 입궐하여 왕세제를 세우라고 청한다. 경종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된 이후에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이 시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경종에게 대리청정이 청해진 배경


당시 노론 강경파, '조성복' 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청했다고 한다. 경종은 이를 허한다. 다만 노론 세력 안에서도 이것은 논의된 사항이 아니었다고 한다. 노론에서는 거두어달라는 청을 올리고, 소론 세력에서도 대리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경종은 대리청정 명을 거둔다. 이 일로 노론은 정치적 명분을 잃게 된다. 내부에서도 지금은 숙여야 한다, 지금 더 경종을 압박해야 한다는 의견이 갈려 갈팡질파하고 있을 때 경종이 직접 연잉군에게 다시 대리청정을 명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극 중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대리청정을 거두어 달라는 상소가 빗발쳐 다시 명을 거두고, 사화가 발생한다.



홍 수찬의 고변서


극 중에서 가상인물 홍 수찬이 사망하며 남긴 고변서는 실제로는 '목호룡의 고변' 이다.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노론의 이이명을 옹립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삼급수를 고변한다. 다만 이 내용에 대해서는 소론조차 무고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엉터리 고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충분한 정치적 명분이 되었고, 경종 즉위 1-2년 만에 신임사화가 발생한다.



경종과 연잉군의 실제 사이는 어땠을까?


극 중에서 경종이 연잉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배우들의 노선에 따라 진정으로 아낀 동생이기도 하고, 노론과 함께 괘씸하게 여겨 대리청정으로 압박하기도 하고, 또 연잉군을 세제에서 폐하고 사약을 내리라는 대신들에게 "물러가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며 지켜주기도 한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경종은 연잉군을 죽일 수 있는 시점에서도 그러지 않았다. 실제로 경종과 연잉군이 형님, 아우 하는 사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연잉군 또한 즉위하여 우리가 아는 영조가 된 이후에도 형님 이야기를 하며 그리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경종이 '후사를 세우지 못한 왕' 이 되기 싫어 연잉군을 더욱 더 보호하려 한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시 경종은 자식이 아예 없었다. 양자를 들여 대를 잇자면 소현세자의 후계인 밀풍군이 유력했는데, 밀풍군은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어 후계로 세우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후사를 세우고 대를 잇는 것, 이것은 유교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일반 양반 집에서도 대가 끊기지 않도록 친척이나 형제 중에 양자를 들인다. 즉, 대를 잇는다는 것은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왕실이다. 왕에게 후사가 없다면 종묘 사직이 끊긴다. 경종과 연잉군의 이복 형제인 '연령군' 이 어려서 사망한 이후에도 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준다. 이미 즉위한 경종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후사를 이어야 한다.


경종과 연잉군은 유이한 삼종의 혈맥이다. 경종 입장에서는 연잉군을 후사로 세우지 못하게 된다면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경종의 입장에서는 이러하다. 연잉군의 생모 숙빈 최씨는 자기의 생모(희빈 장씨) 를 죽게 한 원인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이유로 미워해서 죽이거나 폐세제한다면 자기 후계가 끊어진다. 대신 세울 마땅한 왕실 후손이 없다.


생전에는 본인이 즉위 4년만에 사망할 줄 몰랐을 테니 아들을 낳으면 된다고 느긋하게 생각했을 법도 하지만, 마치 경종은 본인이 자식을 볼 수 없단 걸 알기라도 하듯 연잉군을 후사로서 보호했다. (그래서 경종 불임설이 있다고 한다, 본인도 자식을 못 낳을 걸 알았던 게 아니냐는)


실제로 경종은, 연잉군에게 불리한 진술이 나올까봐 경종의 독살을 시도했다는 김상궁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았을 때에도 "김씨 상궁이 한둘이냐" 며 조사 자체를 하지 않고 덮어주었다고 한다. 왕을 독살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역모이기에 조사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고 한다.


경종이 연잉군을 진짜로 동생으로써 아끼고 사랑했는지 혹은 후사로서 보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로 애써서 감쌌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사족. 숙종이 가장 예뻐한 자식은 연령군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에서는 숙종이 연잉군을 예뻐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가장 예뻐한 자식은 21세에 사망한 연령군이라고 한다.


연령군은 숙종이 노환으로 사망하기 이전에,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연령군에게 자식이 없어 밀풍군의 자식 중에서 양자를 들였는데, 이후로 이 양자가 파양당했다고 한다.)


연잉군 출궁 때 사저 구입비로 2천 냥이 들었는데, 연령군 출궁 때에는 숙종이 수만 냥을 들이려다가 조정의 비판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다만 연잉군이 사달라고 청했을 땐 사주지 않았던 200칸 저택을 연령군에게 사주었다고 한다.



영조 즉위 이후 tmi


즉위한 연잉군의 시호는 영조다. 영조는 즉위 이후에 신치운이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치운은 사형당했다.)


영조가 세제 시절, 형인 경종에게 게장과 감을 올렸는데 이게 함께 먹으면 배탈을 일으켜 몸이 허해진 경종이 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냐는 설이 당시에 있었다. 신치운은 너 형 죽이고 즉위했지, 라는 말을 한 것이고 영조는 그것이 억울해 운 것이다.


또한 영조 즉위 이후에, 그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숙빈 최씨(가 과부였다는 설이 있었다고 한다) 의 전남편 아들인 게 아니냐는 모함을 받았다.

숙빈 최씨는 연잉군(이윤) 위로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 이 아들의 이름은 영수로, 생후 2개월에 사망했다. 만약 모함이 사실이라서 숙빈 최씨가 전남편의 아들을 낳았더라도 그것은 연잉군이 아니라 동복형제 영수였을 것이다.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영조에게는 이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했다고 한다.


멘탈이 상당히 약하다고 볼 수 있겠다.



영조의 탕평책


극 중에서 경종이 연잉군에게 말했던 탕평, 영조가 실제로 펼친다.


숙종에서부터 경종까지 이어진 환국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으로 끝이 나게 된다. 환국 정치가 펼쳐질 때는 귀양이나 유배 수준이 아니라 피바람이 불고 집권세력이 급격히 바뀐다. 경종 즉위 이후에 노론 강경파가 나대다가 경종한테 대리청정으로 명분을 쥐여줬지만 경종 또한 계속해서 환국정치를 펼 수 없었을 것이다. (맨날 신하들을 죽일 순 없을 테니)


연잉군도 환국정치로 계속 신하들을 죽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라, 즉위 후에 본인을 죽이려 했던 소론의 강경파만 숙청했다고 한다. 처형한 것은 소론의 수장 김일경과 고변을 올렸던 목호룡으로, 이후에 '과거는 잊자' 고 했다고 한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배우들의 노선과 정치적 이야기


배우들 노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마다 갈릴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배우들 노선에 대해 정치적인 입장을 비추어보면서 파악하면 꽤 재미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의견을 적어본다.


* 성태준 경종

성태준 경종은 환국정치라는 강력한 카드를 안 쓰려다가 결국 쓰면서 왕권을 세운다. 하지만 숙종처럼 계속해서 환국정치를 반복하며 모든 대신들을 하나둘씩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숙종만큼 왕권이 강하지도 않고, 명분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반쯤은 궁지에 몰려 연잉군에게 명분을 쥐여주기 위해 부자인삼차를 마시고, 중도 하차한단 느낌이었다.  (미처 펼쳐보지 못한 더 큰 뜻이 있는 게 느껴져서 내가 다 아쉽고 아까운.....)


* 에녹 경종

에녹 경종은 반드시 환국정치를 반복하며 정권을 교체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상황에 맞게 정치력을 발휘하며 명분을 가져와, 치세를 이어나갈 수는 있었을 것 같다. 다만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려 미련 없이 연잉군을 지키며 그에게 큰 뜻을 남기고 간단 느낌이었다.


* 정동화 경종

정동화 경종은 감정과 상황에 휘둘리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에 잠깐 눈이 멀어 본인도 환국을 벌이지만 연잉군만은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감정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던져진 느낌이다. 다만 본인이 분노하는 동안에 동생 또한 자기를 지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했음을 깨닫고, 스스로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왕위에 오른 4년 간 가장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 박정원 연잉군

박정원 연잉군은 기본적으로 정치라는 시선보다는, 감정으로 이 모든 걸 대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자이기에 이용당한 사람이랄까?

노론이 경종 독살을 요구할 때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린단 느낌이고, 역사적으로 영조의 일화를 봤을 때 크게 납득되는 노선이다. 아 이런 연잉군이라면.. 게장 이야기에 울고 출생의 모함을 받았을 때 콤플렉스를 가지고.. 그런 영조가 됐겠구나.. 싶은... 느낌이다.


* 홍승안 연잉군

홍승안 연잉군은 정치에 나름 큰 뜻이 있고, 익숙해 보이기도 하다. 자기가 노론을 등에 업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다만 즉위 후에는 그들이 외척 세력이 되어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위 이후 탕평책을 펴면서도 적절하게 숙청을 통해 장기적으로 붕당정치를 끝냈을 영조의 모습이, 잘 상상되는 노선이었다.


* 신성민 연잉군

신성민 연잉군은 본인의 존재가 경종에겐 정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을 듯했다. 자기가 노론에게 이용당한다기보다는 노론의 핵심부에서 중심을 잡으면서 마치 스파이처럼, 필요할 땐 형님 편에 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느낌은 그랬다.

그러다가 자기가 결국엔 노론의 꼭두각시이며 경종에게 최대의 정적이란 걸 깨닫고 한번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경종이 사랑하는 아우인 자신에게 큰 뜻을 남겨주고 부자인삼차를 마시는 걸 보면서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고, 무너지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의 희생이 헛되도록 하지 않기 위해 재위 기간에 최선을 다했을 것 같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아니 그런데 왜 사도세자에게는..?) (뭐 이건 극 바깥의 이야기니까..)






최근에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은 총 3회차의 유료중계를 했다. 개인적으론 페어를 정말 잘 짰다고 생각한다. 중계 페어로 봤을 때 정치적인 관점으로 더욱 더 잘 보였고, 역사를 바탕으로 만든 극의 장점과 재미를 십분 느낄 수 있었다. (유일한 의문 및 아쉬운 점이라면 왜 DVD를 내지 않는가? 하는 것뿐)


초연과 재연 캐스팅이 같아 더욱 더 흥미로웠던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언젠가 다시 돌아올 때는 또 어떤 캐스팅과 어떤 노선을 가져올 지 개인적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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