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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연 Apr 28. 2024

뮤지컬 <광염 소나타> 속 리비도의 종말

1악장 리비도에서부터 5악장 데스트루도에 이르기까지


뮤지컬 <광염 소나타>



뮤지컬 <광염 소나타>는 김동인의 소설 「광염 소나타」를 모티브로 하되 각색을 거쳐 만든 작품이다. 극의 시간적 배경은 소설과 동일하게 1998년으로, 대략 1998년 10월에서부터 1999년 2월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은 총 3명으로 K교수와 S, 그리고 극의 중심 인물인 J다. 먼저 K교수는 클래식 계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집념 하나만큼은 누구나 인정하는 인물이다. J는 일종의 작곡상인 '글로리아 아르티스(Gloria Artis)' 를 수상한 이력이 있는 작곡가다. J와 S는 작업실을 같이 썼던 사이지만 약 반년 전 J가 작업실을 떠났다. J는 현재 갈 곳이 없어 K의 밑에서 작곡을 배우고 있다. S는 J와 오래된 친구로, J의 음악을 듣고 나도 음악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작곡을 시작했다. 극 중 J는 S에게 강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극은 S가 K교수를 납치해 죄에 대해 추궁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극 중 K교수는 현재 시점에서 의자 뒤로 양 손이 묶여 있는 설정이지만 과거 시점에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고 있다. 다만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K교수를 묶었던 줄을 S가 끊어서 풀어주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S와 K교수의 이야기는 과거, J가 처음 K교수의 작업실을 찾아왔던 때로 거슬러 되돌아간다.


1998년 10월, 오갈 데가 없어진 J를 K교수가 제자로 받아주었다. J는 글로리아 아르티스 수상을 목표로 소나타의 1악장 '죽음의 눈동자' 를 작곡하고 있다. K교수에게 보여주지만 J가 써낸 1악장은 K교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K교수는 "자네 혹시 죽음이 단조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라고 묻는다.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냐며 J의 목에 칼을 겨누고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담아 곡을 쓰라고 압박한다. 그리고 내일 오전까지 제대로 다시 써 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J는 K교수가 권한 술을 거절할 정도로 평소 술을 즐기지 않지만,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신 채로 취해서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사고를 낸다. 놀란 마음에 구석진 곳에 피해자를 숨겨두고 작업실로 돌아온 J는 사고 장면을 떠올리다가 알 수 없는 멜로디가 들려오는 경험을 하고 피의 1악장을 써낸다.


다음날 오전, 작업실로 돌아온 K교수는 J가 새롭게 써낸 1악장을 보고 크게 만족한다. J는 2악장을 써야 한다는 새로운 압박감에 휩싸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래를 튼다. 그렇게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Op.130 카바티나를 듣다가 S가 알려주었던 '베클렘트(Beklemmt)' 라는 문구를 떠올린다. S의 전화를 피하고 있었지만 J는 S에게 전화를 걸어서 베토벤이 바이올린 파트 악보에 적어두었던 '베클렘트' 에 대해 묻는다. S는 만약 베토벤에게 더이상 영감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J의 물음에  "어떤 짓이라도 했겠지 지금의 나처럼, 그 어떤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 라고 대답한다.


S는 J가 떠난 뒤로 단 한 곡도 쓰지 못하고 있어서 J를 붙잡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J는 그 말을 듣고 "고맙다" 며 어떤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는 교통사고 피해자를 숨겨두었던 장소로 찾아가 작업실로 데리고 온다. J는 아직 살아있는 그를 이번에는 멀쩡한 정신으로 목 졸라 죽이고, 또다시 찾아온 음악적 영감을 토대로 살인의 2악장을 써낸다.


이 모든 일들은 J의 다이어리에 상세히 적혀 있었다. S는 그 일기에 적힌 구절들을 K교수에게 읽어주며 그의 죄책감을 건드리려 하지만 K교수는 반성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J는 2악장을 써낸 뒤 영감이 찾아오지 않아 괴로워하다 자기 손을 펜으로 찌르기도 했다. S는 눈앞에서 환상처럼 펼쳐지는 그 과거 장면을 보며 J를 안타까워하지만 K교수는 내가 J를 자유롭게 해 준 거라며 뻔뻔한 모습을 보인다.


K교수는 소설 「광염 소나타」에서의 K교수가 했던 것처럼 S에게 질문을 던진다. "기회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천재성과 범죄 본능을 동시에 이끌어냈다면, 그 기회를 축복해야겠나 저주해야겠나?"


여기에서 극은 잠시 과거 시점으로 돌아간다. K교수는 연주회를 앞두고 좀처럼 곡을 마무리짓지 못해 전화로 재촉을 받는다. 전화를 끊고 예전엔 나에게 말도 못 붙이던 것들이, 라며 분노를 삭이던 K교수는 작곡에 임하지만 곧 포기한다. 작곡이 막혀 J가 작업하던 악보들을 뒤적이던 K교수는 J의 다이어리를 발견한다. 1악장과 2악장의 비밀을 알게 된 K교수는 마침 작업실로 돌아오던 J를 다그친다.


J는 이제 절 경찰에 넘길 거냐고 묻지만 K교수는 너의 음악을 위해서라면 내가 도와주겠다고 답한다. 그는 J의 손에 칼을 쥐여주며 다음 3악장의 제물이 될 사람을 지정해 준다. 그렇게 K교수의 조장(助長) 으로 J는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작곡을 이어간다.


때는 1999년 2월 10일로 넘어간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살인이 있었다. 수법은 점점 잔인해지고 J의 곡은 물이 오르지만 아직 J는 4악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라디오에서 연쇄살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자 J는 초조함에 왜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거냐며 미쳐가다 K교수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K교수는 너의 음악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지만 날 죽인다고 음악이 완성될까? J를 다그치고 협박해가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너에게 소중한 것, 사랑이 분노가 되어 결국 자극만을 불러오게 할 대상을 찾아보자고 꼬드긴다. 마침 S의 전화가 걸려오고 K교수는 수화기를 들어 J에게 건넨다. J는 S를 작업실로 불러낸다.


(앞선 장면에서 S와 K교수가 서로를 비난하던 현재 시점의 대화를 통해, J는 모르고 있지만 관객들은 알게 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하나, K교수는 스스로 곡을 끝까지 완성해 본 적이 없으며 장학금을 대가로 S의 곡도 빼앗았다. 지금 K교수의 명성은 전부 다 그렇게 얻은 것이다. 하나, K교수는 여유롭게 S가 악보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너야말로 J를 이용한 것 아니냐고, 너의 모든 곡은 다 J가 받아 적어준 것이 아니냐고 비난한다. S는 여기에 대해 부정하지 못했다.)


전화를 받은 S는 J의 작업실로 그를 만나러 온다. 하지만 둘은 만나자마자 싸우게 된다. K교수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S가 J에게 여기서 떠나자고 말한다. J는 너 여전하구나 내 말 내 의지 따위 신경도 안 쓰는 거, 그리고 이제 난 되돌아갈 수도 없다고 대답한다. (J는 K교수가 제자들을 이용하고 곡을 빼앗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S는 J가 이미 작곡을 위해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른다.)


J는 S를 죽일 마음으로 불러냈지만 막상 마주보고 정이 되살아나 망설인다. 마지막으로 네 연주가 듣고 싶다는 J에게 S는 젓가락 행진곡으로 장난을 친다. J가 처음 작곡했던 곡을 연주하며 이거 기억나? 묻는 S의 앞에서 J는 마음이 풀어져 함께 연주한다. 잠시나마 즐거웠던 과거로 되돌아갔던 J가 정신을 차리고 S에게 그동안 묻지 못했던 질문을 한다. "너 왜 말 안 했어? 글로리아 아르티스."


J는 S가 흥얼거린 곡을 악보 위에 옮겨주었고, 그 중 하나를 가지고 글로리아 아르티스를 수상했다. S는 여기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았고 J는 자기가 친구의 곡을 훔쳤다는 죄책감과 열등감에 혼자 곪아가다가 S를 떠났던 것이다. S는 그건 네 곡이었다고, 넌 네 힘으로 글로리아 아르티스를 수상해 낸 거라고 말한다. J는 너는 언제나 그렇게 여유로웠다며, 그래서 나는 네 옆에서 스스로 열등감이라는 지옥에 갇혔다고 힘들게 고백한다. S는 사과하며 그래도 이 작업실에서 떠나자고 하지만 J는 S를 죽이지 않기 위해 내보내려 한다.


J는 너 이제 더 이상 내 음악적 영감이 될 수 없으니(너를 죽여서 4악장을 완성하고 싶지 않으니) 너 어서 가라고 말한다. S는 이 말을 듣고 "음악에 영감이 뭐가 필요해" 라는 말로 답한다. S의 천재성에 열등감을 느끼던 J는 그 말을 듣고 폭발해 S를 찌른다.


J는 그렇게 4악장을 완성해낸다. 그리고 라디오에서는 연쇄살인의 단서를 잡았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피해자들의 몸에 음악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J는 1악장부터 3악장까지 작곡하면서 피해자들에게 각 악장의 이름을 몸에 새겨 놓았다. 1악장 모르모란도, 2악장 렐리지오소, 3악장 시밀레, 4악장 아모로소.) 그리고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K교수가 화가 나 작업실로 들이닥친다. K교수의 너 미쳤어? 라는 비난과 추궁에 J는 떠나겠다고 답한다. 함께 음악을 하던 S를 죽이고 의욕을 잃어버린 것이다. K교수는 분노해서 여기서 멈추면 넌 살인자가 되는 거라며 네 목숨을 바쳐서라도 5악장을 완성하라고 J를 몰아붙이고 떠난다.


남겨진 J는 스스로의 몸에 5악장의 이름이 될 베클렘트를 새기고 다시금 찾아온 음악적 영감에 귀를 기울이며 죽음에 대한 열망으로 소나타를 완성한다. 그리고 J는 톨스토이의 「인생의 길」에서 나온 문구를 다이어리에 적는다. 그리고 한 구절을 덧붙인다.


"죄를 저지르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

"이제 나는 그 악마를 죽이기로 한다."


광기로 가득찬 선율이 빠르게 내달리다가 익살스럽고 밝은 음악으로 바뀌면서 J가 작업실 전체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 J가 "어서 이 음악을 완성해 너에게 갈게 빛바래지지 않게," 라며 S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극은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온다. K교수는 이제 와서 어쩔 거냐며 복수를 위해 나를 죽이기라도 할 테냐고 묻는다. S는 칼을 들어올리다가 "아니, 나도 너 같은 악마가 될 수는 없잖아" 라며 K교수를 묶었던 손목의 끈을 풀어주고 내보낸다. 밖에 경찰과 기자들이 와 있으니 그들이 너를 심판할 것이라고.


K교수는 나가기 직전에 S에게 묻는다. "역사가 이 소나타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군."


남겨진 S는 J를 그리워하며 이제 만족하냐고, 그러니 너도 죽음을 택한 거겠지? 혼잣말한다. S는 악보 위에 소나타의 선율을 그려넣고 미소짓는 J의 환영을 본다.


극은 이제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 캄캄한 암전 속에서 J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이 소나타를 아름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해주길, 아름다운 건 이 곡을 아름답다고 느낀 당신의 마음 뿐이라는 것을."





리비도와 데스트루도


자, 이제 기나긴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비로소 끝났다. 본격적으로 리비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먼저 '리비도' 에 대해 정의 내려 보자.


리비도(Libido) : 삶의 충동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리비도는 성욕을 뜻하기도 한다지만 그것에 앞서서 이드(id)에서 나오는 정신적 에너지를 말한다. 즉 사람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다. 카를 융은 이것을 확장하여 역동성을 가진 생명의 에너지로 해석한다. 내가 뮤지컬 <광염 소나타> 와 엮어서 말하고자 하는 리비도는 카를 융의 개념에 가깝다.


즉 리비도는 생명(에로스) 로부터 시작되는 에너지로, 창조를 갈망하는 욕구에 해당한다.


데스트루도(Destrudo) : 죽음의 충동

리비도에 반대되는 '죽음 충동의 에너지' 를 뜻한다. 사실 개념 자체는 리비도와 함께 생겨난 셈이지만 프로이트가 여기에 명확하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리비도만 이름 지어 줬다.) 학자마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지칭하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데스트루도는 이탈리아 정신분석학자 에도알도 바이스가 붙인 이름이다.


즉 데스트루도는 죽음(타나토스) 로부터 시작되는 에너지로, 파괴를 갈망하는 공격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뮤지컬 <광염 소나타> 속 리비도


리비도는 성적 리비도, 대상 리비도, 자아 리비도로 나뉜다.


성적 리비도는 정욕이나 애정, 쾌락을 뜻하는 개념에 가까운 것 같다. 아마 리비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이 이것 아닐까? 프로이트가 초기 저서에서 리비도를 성욕(sexual desire)에 가까운 개념으로 지칭했기에 그런 듯하다.


대상 리비도는 대상에 주입되어 축적되는 것으로 특정 상대를 향한 우정, 부모를 향한 애정, 연애감정, 혹은 질투 등을 말한다고 한다. 나는 뮤지컬 <광염 소나타> 에서 J가 S를, 그리고 S가 J를 향해 느끼는 감정이 대상 리비도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건 우정일 수도 있고 질투일 수도 있다. (박준휘 J는 혜화로운 공연생활 영상에서 각 S를 향한 느낌을 설명했는데 유승현 S에 대해서는 좀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영상 속 대답을 들으면서 J의 '대상 리비도'가 S를 향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비도는 “물리적 힘”이자 “양적 개념으로 측정할 수 있는 화학 성분” 을 뜻하기 때문에 질투 같은 감정도 아우른다.)


자아 리비도는 기본적으로 리비도가 가변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흐름을 말하는 듯하다. 대상을 향하던 리비도가 자신에게 돌아올 때의 에너지를 말한다. (에너지의 종류라기보다도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리비도가 향하던 대상으로부터 물러나면 다시금 자아로 이끌린다는 것이다.





극 중 J의 리비도와 데스트루도 작용에 대해
(1악장에서부터 5악장까지)


1악장, 모르모란도(mormorando)


1악장을 작곡할 때 J가 느낀 것은 강한 리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J는 '죽음의 눈동자'를 주제로 1악장을 작곡하고 있었다. 하지만 K교수는 만족하지 못한다. 단조(minor)로 쓰인 것도, 곡에 사용된 동기(motive)도 전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힐난한다. 그는 J에게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J는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는 일 아닐까요?" 라고 대답한다. 이 순간 J는 죽음에 대해 상상했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는 단절감,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 그리고 K교수는 직접 J의 목에 칼을 겨눈다. 지금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을 담아 곡을 쓰라고 압박한다.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살고 싶다는 뜻이다. 리비도는 삶의 충동, 삶을 소중히 여기는 긍정적인 에너지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 삶을 유지하고 싶다는 본능적 차원의 욕구다.


J는 만취해 교통사고를 내고 피 흘리며 죽어가던 피해자를 바라보고 두려움을 느낀다. 이 사고로 내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를 인적 없는 곳에 숨겨놓고 작업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J는 강한 리비도를 느낀다. 죽어가던 피해자가 흘린 피, 꺼져가던 숨소리,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던 입술과 묘한 표정. 그리고 J는 1악장을 완성한다.


강한 리비도를 토대로 '죽음' 에 대한 선율을 담은 1악장은 K교수를 만족시킨다. 이 1악장은 모르모란도(mormorando), '속삭이듯이 조용조용하게 이야기하듯이'라는 뜻이다.


J에게 찾아온 죽음이 속삭인다. "내가 두렵니?"




2악장, 렐리지오소(religioso)


2악장에서는 리비도(창작에 대한 열망), 데스트루도(살인을 향한 파괴적 충동)가 동시에 나타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리비도가 나타나는 형태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아까처럼 삶을 향한 충동이 아니라, 창작을 향한 열망으로 나타난다.


먼저 리비도의 작용이다. J는 계속해서 2악장을 써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교통사고 피해자를 숨겨 두었던 곳에 찾아가 그를 작업실로 데리고 온다. 이것은 '작곡'이라는 창작 행위를 완성해야 한다는 리비도에 의해 움직인 것이다.


이어서 데스트루도의 작용이다. "미안해요" 외치면서도 J는 그에게 달려들어 양손으로 목을 조른다.


2악장은 렐리지오소, '경건하게' 라는 뜻이다.


J는 자신을 찾아와 조용히 속삭이는 죽음을 경건하게 마주본다.




3악장, 시밀레(simile)


3악장에서는 강한 리비도, 그리고 그것보다 더 강한 데스트루도가 동시에 작용한다. J의 에너지는 최고조에 달한다.


K교수는 자신을 만족시켰던 1, 2악장의 비밀을 알고 J가 다시금 살인을 저지른 뒤 작곡을 이어가도록 한다. 위대한 예술가여, 위대한 작곡가여, J를 부추긴다. 그리고 J는 2악장에서 이미 했던 행위, 즉 살인을 다시금 반복한다. 다만 K교수가 쥐여준 칼과 함께 계획적으로 저지른 살인은 더 크고 강한 흥분을 주었을 것이다.


3악장, 시밀레(simile)는 '먼저 부분과 같은 연주를 반복하라'는 뜻이다.


J는 1악장에서 조용히 다가와 내가 두렵냐고 속삭이는 죽음을 보았다. 2악장에서 그 죽음과 경건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3악장에서 대답한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




4악장, 아모로소(amoroso)


4악장에서는 강한 리비도가 작용한다. 이 때 작용하는 리비도는 대상 리비도로, 총 2가지의 형태를 보인다. 하나는 S를 향한 강한 애정과 우정이다. 또 다른 하나는 S를 향한 강렬한 질투이다.


J는 S와 함께 자기가 과거 처음 작곡했던 곡을 연주한다. S를 향한 열등감은 J의 마음 속에서 잠시 녹아 사라진다. 과거에 음악이 그저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질투심과 분노에 가려 잊고 있었던 우정도 되살아난다.


J는 S에게 빨리 이 작업실을 떠나라고, 가라고 말한다. 너를 죽이지 않겠다는 의지. 애정과 우정이라는 형태의 대상 리비도가 작용하면서 칼을 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있던 J의 데스트루도가 약해졌다.


하지만 S는 말한다. "음악에 영감이 뭐가 필요해?" 그리고 이 말은 J의 마음 속에서 또다른 리비도, 질투를 강하게 일깨운다. 만약 보통의 경우였다면 심각한 수준의 말다툼이나 몸싸움이 오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를 정도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J는 이미 강한 데스트루도를 느끼고 그것을 살인으로 연결한 경험이 몇 번이나 있다. (K교수의 말에 따르면 "세 번? 네 번? 아니 다섯 번인가?")


J가 느낀 리비도(질투), 데스트루도(파괴욕)는 S를 찌르고 쓰러진 틈을 타 목을 조르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J가 정신을 차렸을 때 S는 이미 죽어 있었다. (적어도 J는 그렇게 믿는다.)


4악장, 아모로소(amoroso)는 '애정을 가지고 또는 사랑스럽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J는 자기 앞에 다가온 죽음에게 네가 두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있던 S를 자기 손으로 죽음에게 바쳤다.




5악장, 베클렘트(Beklemmt)


5악장, 리비도의 종말이다.


J : 떠나겠습니다, 다 의미가 없어졌어요

K : 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소나타를 완성해


이제 J의 리비도는 오직 S를 향한 애정으로만 나타난다. 작곡을 향한 열망, 창작 행위를 향한 욕구로 나타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애착과 생존 본능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J는 K교수의 말대로 자기 목숨을 바쳐서 5악장을 완성하기로 한다. 데스트루도가 마지막으로 타오른다.


S는 4악장이 되어버렸다. 악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S의 곁으로 가기 위해서 J는 5악장이 되어야만 한다. 그냥 죽음의 상태에 도달하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5악장, 베클렘트(Beklemmt), '죄다, 압박하다, 괴롭히다'는 뜻이다.


J는 스스로를 고통 속에 밀어넣어 5악장을 완성했다. 바야흐로 '광염 소나타' 의 완성이다.




남겨진 이야기


리비도는 사라졌고 데스트루도는 산화했다. J는 5악장이 되었다.


하지만 극 중 S는 살아 있다. 남겨진 S는 자기를 뒤따라온다고 믿고 죽음을 택한 J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이제 리비도와 데스트루도는 남겨진 S의 몫이다.


S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각 배우들마다, 그리고 관객의 상상에 따라 달라진다. 그는 이제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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