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by mari


제1화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비 내리는 도로 위의 도로>



사직서(辭職書).

언젠가 필요한 날을 위해 준비한 서류이다.


써야 할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 보험 같은 존재이다.

가슴에 은장도는 없지만 내 서랍에는 사직서가 있다.


국민연금 가입 20년이 넘었다.

연금의 액수에 놀라는 게 아니라 직장인으로 오래 살았음에 놀란다.


'이제 그만할까?'


20년 동안 몇 번의 가벼운 고민은 있었지만 가슴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고민은 처음이다.


유치원 행사가 있다며 신이 난 첫째 아이의 들뜬 얼굴이 떠오르고

할머니 품에 안긴 둘째 아이의 모습이 투샷의 에스프레소 열 잔 마신 기분이다.


답이 없는 질문을 혼자 읊조리며 서랍 속에 나의 은장도를 생각했다.



비를 좋아하는 이유.


세상을 흐릿하게 해 주는 고마운 비.

세상과 끝을 낼 수는 없지만 적절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왜 벗어나지 못해 아우성일까?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하다.


5시 정각.

반가운 비가 내리는 기분 좋은 퇴근시간이다.


'혹시?'


세상과의 적절한 거리 두기를 해 주던 비가 믿기 힘든 세상의 문을 열어주었다.


비 내리는 도로 위의 도로.


외투와 가방을 챙기며 꿈이라 생각했던 일을 다시 겪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한 달 전.

비가 내려 퇴근을 서두르다 볼쌍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져 느끼는 아픔보다 창피한 마음이 커서 질끈 감은 눈을 최대한 느리게 뜨는데..


'여기가 어디지?'


비 내리는 도로 위에 도로가 또 있다.


흐르는 물웅덩이에서 올라오는 축축한 비 냄새와 따스한 만두냄새가 꿈을 꾸는 것 같다.


원래 모험이나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하지만 물러설 길이 없었다.


금방 사라질 헛것이라 생각하니 따스한 만두 냄새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이 든다.


'내가 걸어와 도착한 걸까? 만두 가게가 내게 다가온 걸까?'


손으로 잡힐 듯 가까운 만두 가게.


'먹고 싶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고민으로 잡아주는 은장도 사직서보다 더 짜릿하다.


세상을 벗어날 큰 용기가 부족해 적절한 거리 두기로 살아가지만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비 내리는 도로 위 도로에서 만난 만두 가게.


'단지 신기루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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