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양씨세보』, 양순모 애국지사의 재판기록, 재판 관계 신문 기사, 조선총독부 경시청의 당시 자료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양순모 애국지사 묘비명 등과 유족인 조카 양희국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한 동해역사문화연구회 윤종대 회장의 글을 통하여 양순모 애국지사의 일생 및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등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양순모 애국지사의 가계와 성장 과정
양순모 애국지사는 남원양씨(南原梁氏) 시조 양능양(梁能讓)의 32세손이다. 한학자로 유명한 아버지 양원달(梁源達, 1880~1941)과 어머니 강릉 최씨(江陵崔氏) 사이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1905년 11월 10일 동해시 비천동에서 태어났다.
비천동에서 한문 서당을 하던 아버지 양원달은 1909년경에 삼척군 미로면 고천리 주민들이 서당의 선생으로 초빙하게 되자 가족이 모두 고천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아버지의 지도로 한학에 몰두하였으나 신학문을 익히기 위하여 1920년대 초에 단신으로 상경하여 일제하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에 재학할 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장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북경 화북대학 재학 시 북경반제동맹(北京反帝同盟)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반제동맹(反帝同盟)은 1927년 2월에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반제국주의자 국제 대회에서 조직된 동맹으로 모든 피압박 민족의 해방 운동의 전선 통일, 민족 자치, 계급 타파, 인간 평등의 실현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2. 애국지사 양순모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1) 유공자 정보
관리번호: 7265
성명: 양순모
한자: 梁珣模
이명: 없음
성별: 남
생년월일: 1905년 11월 10일
사망연월일: 1945년 08월 26일
본적: 강원도 삼척 未老 古川 522
2) 포상정보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연도: 1993
훈격: 애족장
3) 공훈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강원도 삼척(三陟) 사람이다.
1930년 4월 서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졸업과 함께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서 화북대학(華北大學)에 입학하고 동시에 북경반제동맹(北京反帝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1931년 9월 일제의 대륙침략을 목적하는 소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활동의 시급함을 자각하고 1932년 2월 하순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무르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4월 2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에 발각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1932년 7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광복운동에 종사하던 중 1945년 8월 초 광복을 앞두고 은밀히 입국하여 강원도 춘천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하고 건국운동에도 참가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334면
동아일보(1932. 4. 15, 4. 27, 6. 28, 7. 5)
조선일보(1932. 6. 28, 7. 5)
4) 공적개요
1930. 4월 보성전문학교 재학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북경의 화북대학에 입학하고 동시에 북경반제동맹에 가입하여 의열단장 김원봉의 지도를 받으며 활동하던 중 1931.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활동의 시급함을 자각하고 1932. 2월 하순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무르면서 동지를 규합*,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5)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성명: 양순모
출신지: 강원 삼척(三陟)
운동계열: 중국방면
관련단체: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삼척재외학우회, 베이징반제대동맹(한인지부)
관련사건: 학생치안유지법사건, 북경반제동맹사건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3)
주요활동: 1927년 삼척재외학우회 초대 집행위원장. 1929년 5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장. 1930년 베이징반제대동맹 한인지부 설립.
본문: 1905년 11월 10일 강원도 삼척군(三陟郡) 북삼면(北三面) 비천리(飛川里)에서 양원달(梁源達)과 최씨 슬하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삼척군 미로면(未老面) 고천리(古川里)이다.
1924년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고, 1925년 9월 창립된 사회주의계열의 학생결사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7년 삼척재외학우회(三陟在外學友會)의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었고, 1928년 재선되었다.
1928년 9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이하 ‘연구회’) 제7회 정기총회에서 서무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1월 26일 서대문경찰서에 붙잡혀 12월 6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넘겨졌다. 예심에서 불기소 결정으로 풀려났지만, 연구회의 개정규약을 등사·배포한 것이 출판법 위반이라 하여, 1929년 3월 4일 경기도경찰부에 재차 붙잡혀 조사받고 풀려났다.
1929년 5월 11일 연구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회원 및 재정 관리, 기관지(『학생과학』) 간행, 추계 음악회 및 학술강연회 등을 이끌었다. 11월 22일 연구회 차원에서 몇몇 중등학교의 비밀독서회 조직을 지도하고 맹휴를 배후조종했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취조받았다.
1930년 4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2학년을 중퇴하고,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화베이대학(華北大學)에 입학하였다. 이후 시안먼(西安門) 대가(大街) 7호의 공우(公寓)에 거주하며, 베이징반제대동맹(北京反帝大同盟)에 가입하였다.
1931년 1월말 경 김성일(金成一)의 권유로 보성전문 동창이면서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재학생인 강릉(江陵) 출신 최신영(崔信泳) 및 삼척 출신 김용운(金龍雲) 등과 반제대동맹 한인지부를 설립하였다. 매주 1회씩 지부 서성반(西城班) 모임을 가지면서 활동하고, 3·1운동 기념일, 5·1 메이데이, 8·29 국치기념일에는 본부에서 만든 격문을 살포하였다.
1931년 11월 13일 한위건(韓偉健)·김성일 등과 국내 반제동맹 조직에 대해 협의하고, 이틀 후 서울로 들어왔다. 같이 밀입국한 최신영과 김용운이 경찰에 붙잡혀 기소되었으나, 양순모는 피신하여 기소중지자가 되었다. 1932년 4월 2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에 붙잡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7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3년 11월 24일 만기 출옥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1945년 8월초 밀입국하여 강원도 춘천(春川)에서 광복을 맞았는데, 같은 달 2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6) 수형기록
① 1928년 인물카드
② 1932년 인물카드
죄명: 치안유지법 위반
처분: 징역 1년 6월
판결기관: 경성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7) 묘소 정보
묘소구분: 국립묘지
묘소명: 대전현충원
소재지: 대전광역시 유성구
3. 애국지사 양순모 묘비명
공의 본관(本貫)은 남원(南原)이며 문양공(文襄公)의 후손 석천(石泉) 원달(源達)의 4남 중 차남이시다.
유훈(遺訓)은 백족지충 사이부도(百足之蟲 死而不到)라 하셨는데 즉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죽어도 쉽게 죽지 않는다. 일경(日警)의 잔인한 고문을 당하시면서 이같이 외치시었다.
고향 두타산에 모셨는데 조카들이 뜻을 모아 비석만 남겨두고 대명당(大明堂) 여기에 오셨으니 영면(永眠)하소서
1929년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장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을 서울에서 주도
1930년 중국 북경 화북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재학 중 항일운동 반제동맹의 일원으로 해외 독립지사들과 함께 활약
1932년 서울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7월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옥고
1993년 국민훈장 애족장 추서
장질 희국
질 희종
질 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