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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Jul 24. 2023

아무것도 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주체가 되는 연습




무엇이 되기로 마음먹은 지점의 땅에서 불행의 씨앗은 고개를 들고 발아하기 시작한다. '하나 더', '제발 이것만' 연쇄적으로 욕망할수록 사고는 굳어지고 삶은 엉켜버린다.

   


진로 고민에 애쓰던 20대, 크고 높은 포부를 담은 창작을 시작하고 브랜드를 만들었다. 작품 하나의 기획부터 판매까지 모든 공정에 순수 수작업의 공이 들어갔다. 일신을 갈아 넣은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랑받아 나를 둘러싼 모든 사정이 좋아지길 바랐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머니 사정이. 바람과 달리 매일 아침 눈뜨는 게 싫었다. 내 작업을 놓지 않고 이어간다는 자부만으로 생활하는 건 매일의 인내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원하는 일을 흐트러짐 없이 잘 들고 있으려면 다른 추가 노동이 밑에서 탄탄하게 받쳐주어야만 했다. 꿈의 씨앗을 길러내고 부양하기 위한 번다한 노동은 삶의 무게를 더해갔다. 잘되길 바라고 욕망할수록 허물어지는 마음은 서질줄 몰랐다.



춥고 매캐한 구간의 터널을 지나 다 접고 잊고 살았다. 잊지 못하지만 잊고 싶었다. 그 구간만 가위로 오려내고 없던 일로 해서 다시 산뜻하게 출발- 할 수 있게 삶을 리셋하고 싶었다. 곯지 않을 만큼 곳간을 채울 수 있는 생활을 꾸렸지만 정신의 텅 빔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잘 몰랐다. 구멍 난 삶의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건 도돌이표 찍은 창작뿐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대략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와락 감정을 토해내듯 서툴고 투박한 솜씨로 마음을 써내고 그려서 sns 계정에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봐주는 이가 생기면서 이 마음과 저 마음을 이어주는 창이 생겼다. 마음의 갈증이 해소됨을 느끼기 시작하고부터 다시 욕심이 났다. 창작물로 배불리 먹고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하루빨리 그들처럼 되고 싶어 안달 났다. 게시물 반응도에 따라 일비일비一悲一悲하며 손 안의 하루를 망치고 팔로워 수에 목을 매니 사람이 하나 둘 떠날 때마다 자책과 자기 검열이 더해졌다.



뿌리내린 욕망의 꽃 아래 초조의 그림자가 발현되는 줄 모르고 물과 볕을 내주며 길러낸다. 잘 되려고 하는 마음은 느슨히 생을 앗아간다. 고유의 빛깔, 목소리, 리듬, 에너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손에 쥐고 있는 모래알처럼 빠져나간다. 조각조각 파편으로 흩어진다. 내일의 행복 옆엔 안개가 잔뜩 껴 언제 퍼부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먹구름이 동반된다. 힘 빼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몸은 구름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내게서 저만치 떨어져 보기. 고의적인 삶의 빈터를 내는 여행을 결심했다. 앞장서서 세상에 감응하며 나를 배워갔다. 몇 살에 어떤 걸 해야 하고, 무엇을 소유해야 하고, 통장에 돈은 얼마 정도를 모아야 하는지 같은 통념적인 삶의 틀을 갑갑해하면서도 나만의 이상적인 형틀을 제작해 그 안에 자아를 구겨 넣어 살고 있었다. 내가 바랬던 꿈은 타인의 주관을 입은 꿈이 아니었는지 맨 처음으로 돌아가 회의했다. 중요한 건 지금처럼, 지금까지의 마음으론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널따란 빈터 안을 메워갔다.



기진한 마음의 현미경을 닦아내고 삶의 향방을 갱신해 보기로 했다. 마음 아래 삶을 내려놓아 확대하고 관조했다. 나와 내 삶을 이루고 있는 조건은 다양했다. 돈, 건강, 행복, 꿈, 관계. 무엇으로 구성되어야 충만한 삶을 이루는지 '나'를 이루는 요소에 질서를 부여하고 재배치했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로 환전되는 삶이 아닌 실존적 의미를 지닌 삶을 헤아리고 싶었다. 그때 결심했다. 성취만이 자존감을 높여주고 이상적인 자아를 이뤄준다고 믿는 삶은 그만두기로.



아무것도 되지 말자. 그 누구도 되려 하지 말자. 학창 시절 「남이 원하니까 나도 원했던」 꿈의 탐함부터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허물을 벗고 다른 무엇이 되려고 버둥거렸으면 됐다. 이제 그만 안달과 책망의 땅에서 넘어오자. 남은 시간은 세상에서 '좋은 삶'이라고 알려주는 땅이 아닌 그 자체로 내게 의미 있는 땅을 찾아 가꾸어보자.





입지전적 남의 길이 아닌 나를 탐사한 삶의 궤적을 그린다. 힘쓰는 대상을 옮겨오는 과정이다. 내가 부릴 수 있는 오늘을 어루만지는 것. 오늘의 주체가 되어, 온전한 내가 되어 살아갈 때 나의 생에 평온함이 몰려온다. 요동치는 파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저 멀리 파도가 오는 게 보이고 곧 나를 덮칠 게 뻔하다는 걸 알아도 위엄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다음날에는 다음날의 오늘을, 그다음 날에는 그다음 날의 오늘을 연습하는 여기에 존재한다. 순간에 만족하는 삶은 더 이상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목표가 없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불안을 짊어진 미래의 성찬을 꿈꾸기보다 질박한 나 그대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방향성을 꼭 붙잡은 오늘의 온전한 자아는 불안과 데면스럽게 공존하며 살아간다. 나답게 사는 자유의 본질을 알아가는 진행형 삶을 살고 있다. 부딪히고 느끼고 의문하고 멈추고 바꾸고 꿈꾸며 삶의 화판을 채워간다. 내일은 또 이 마음이 어떻게 뒤집힐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자아의 변덕스러움과 불확실성을 언제 마주할지 모르겠으니 오늘은 일단 이 마음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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