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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Nov 09. 2023

난 아무것도 아니라서 아무거나 아무렇게 다 할 수 있어

아무렇게나 할 줄 아는 연습



창작과 다시 손잡고 우리 잘 지내보자, 얘기한 지 1년이 지났다. 짧지 않은 시간이 누적됐지만 잘해야 하고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은 여전히 내 옆 가장 좋은 vvip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사람을 못살게 굴고 피곤하게 하는 일인지 뼛속부터 진작 알고 있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무엇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몇 달을 출발선에서 벗어남 없이 달릴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손 위치는 더 몸에 밀착시켜야 할 것 같고 뒤꿈치를 세운 뒷발은 땅을 더 세게 누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고쳐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자세. 출발 신호탄은 고리짝에 터졌는데 옷매무새가 뛸 때 불편할 것 같다. 다 수습하고 나서야 출발선으로부터 해방되는데 이내 알게 된다. 내 마음력과 체력 배터리가 한 칸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너무 잘 해내고 싶음이 강한 마음은 배터리가 곱절 빠르게 소모된다. 그냥 하면 되는 걸, 한 번쯤 그냥 해보면 되는 건데 왜 그 한 번이 이리도 멀까. 나를 둘러싼 기준이 30미터 담벼락을 타고 올라간다. 낑낑대며 담벼락을 올라타서 내놓은 걸 보면 완벽한가? 마음에 드나? 물어오는 말에 시선은 발끝으로 떨궈진다. 이 과정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퍼포먼스였을까.

 


 인스타그램에 처음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 역시 동일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마음먹은 시점부터 올리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다. 결과물을 보고 있으면 이거 하려고 그 꼬부라진 길을 자처하고 나서서 대장정을 펼친 건가 헛웃음이 난다. 그 과정에서 선이 더 야무져진다거나 스토리가 치밀해진다거나 하는 감각은 별로 없었다. 준비할 시간에 내놓으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였다. 출발선만 끊었을 뿐인데 생기가 빠져버린 몰골만 내게 남았다.



 얼마 전부터 왼손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시중에 나와있는 어떤 폰트도 마음에 들지 않고 30년 훌쩍 넘게 오른손에 장착한 고유의 폰트는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빛이 노곤한 오후였다. 작업대에 앉아 왼손에 준 적 없던 펜을 쥐여줬다. 우연이었다. 되는대로 마음을 끄적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모양의 글자가 종이 위에 놓인다. 날것의 모양이 자연스럽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양새가 재밌다. 마음에 드는데? 이런 걸 콩깍지라고 하나. 용돈을 털어 수 십 차례 수정을 거쳐 만든 폰트보다 꼬불꼬불 아무렇게나 놓인 왼손글씨가 더 예뻐 보인다. 내게 없던 자유로움을 가져서일까. 잘해야 함을 강요하는 마음의 압박을 비웃는 멋대로라 더 좋음이다. 격하게 표현하면 고조된 기분을 주체 못 하는 미친 망아지가 들판을 뛰어다니는 글씨다. 아니 글씨라기보다 어쩌면 그림에 더 가까운, 거기서 살짝 다듬어진 형태랄까. 탄력을 받아 높아진 기분은 더 신나게 해 보자 마음먹게 된다. 정체 모를 부담이 한 바가지 덜어지고 더 마음대로 하게 되는데 나쁘지 않다. 막 쓴 글씨와 어울리는 나의 막 그린 그림도 좋다. 자아가 강한 선은 삐뚤빼뚤, 색칠은 선을 보란 듯이 빗겨나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고 단정하고 점잖은 나는 내가 먼저 불편함을 느껴 벗어던지고 싶은 나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리 보이고 싶었던 걸까.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마음먹고 혼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혼자지만 거창한 프로젝트. 아무거나 아무렇게 다 해보는 프로젝트. 이건 다 연습 게임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엉망진창이라도 매일 같이 콘텐츠를 업로드하기로 했다. 완벽주의라는 완벽한 허상일 뿐인 존재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 엉망진창이라는 말은 아직 무섭고 거부감이 든다. 어느 정도 봐줄 만한 한계선을 두고 올린다. 잦은 빈도로 올리면서 밥 먹고 숨 쉬고 잠자는 것처럼 별생각 없이 하는 일로 느껴지게끔 만드는 과정이다. 반응이 없어도 혹은 전보다 덜해도 흔들리지 않는 맷집을 키우는 방법이다. 콘텐츠를 올리는 날에는 평소보다 더 예민함이 느껴지곤 했다. 옆에서 보는 타인이 그냥 게시물 하나 올리는 건데 왜 그래? 하는 일이 나에겐 '그냥'이 될 수 없었다. 기분을 역차순으로 따라가다 강박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됐다. 남과의 비교에서 나를 깎아내는 것도 떡하니 한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잘하고 싶은 강박의 뿌리가 계속 자라 단단해지면서 생겨난 본질적인 문제였다.



 아무렇게 프로젝트를 뒷받침해 줄 중요한 일 한 가지가 있다. '좋아요' 숨기기 기능을 맘껏 활용하기다. 타자의 게시물 반응도를 보며 그러고 싶지 않아도 내 게시물과 비교하곤 한다. 공간 안에 머물다 보면 그렇게 된다. 여기선 그게 도리고 자연스럽다. 숫자는 부정할 수 없이 너무나 확실하고 선명하니까. 몇 날 걸려 만든 콘텐츠가 개수의 갈림길에서 나뉘는 것에 마음 편한 날이 드물었다. 나한테 더없이 소중해도 모두에게 그럴 순 없으니 신경 쓰지 말자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좋아요 숨기기 기능을 알고 있던 건 꽤 오래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왜? 하는 느낌이 강했다. 여기서 또 한 번 완벽주의가 나와서 흠칫했던 건 이 기능을 앞으로 쓰겠다고 한다면 전에 올린 백여 개의 콘텐츠의 '좋아요' 기능을 숨김 해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야 보기에 짜임새가 맞을 테니까. 나는 숨 쉬듯 완벽을 향한 강박에 나를 몰아넣고 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의 내가 강박의 끈에 한쪽 발이 묶여 달아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며 살고 있을 거란 슬픈 생각이 든다.



 대단해 보이고 싶고 잘 해내고 싶고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은 서서히 조용히 타들어간다. 그만 새까매진 필터를 갈아 끼우고 가벼워진 눈으로 나를 만나고 싶다. 무엇인지 모를 보상을 위해 오늘의 편안한 마음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하루의 처음, 반쯤 떠진 눈으로 치약을 짜며 생각한다. 나는 결코 아무것도 아니라서 아무거나 아무렇게 다 할 수 있어. 프로젝트의 목적은 명백하다. 가벼워지고 자연스럽고 편안해지기 위함이다.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으니, 아니 더 많으니 순응의 편에 서기 위함이다. 잘 되고 싶고 잘하려 할수록 되는 게 없다는 게 이 땅의 이치니 아무렇지 않게 그냥 해보기 위함이다. 창작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에 감사하고 마음 편하게 창작하자, 하며 감사와 평안을 오래도록 가져가기 위함이다.


아무것도 아닌 나야,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해. 아무렇게나 해. 찐하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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