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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가다 뛰는 도련님 Oct 26. 2022

#15 I LOVE PLASTIC

세상 구하겠다는 내 꿈은 몇 점인가

카페로 허름한 차림의 할머니가 들어오신다. 내 눈치를 보며 카페 내부를 두리번거리시는 할머니의 눈빛에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서려있다. 나와 눈을 마주쳤지만 애써 외면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보니 냅다 손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마다 껌을 하나씩 두기 시작하신다.



잡상인이다.



카페에는 할머니와 같이 환영할 수 없는 불청객들이 간혹 나타난다. 대표 지인이라는 사람은 매일 카페에서 치아버터와 수박주스로 식사를 한다. 대표 지인이라는 게 벼슬도 아닌데 카페 직원인 내가 당연히 서비스해야 하는 것처럼 구는 태도가 참 안쓰러웠다. 덕분에 제품 수량이 안 맞으면 전부 대표지인이 먹은 걸로 처리했다. 그 외에 술에 취해 여자화장실에서 잠을 자던 남자 손님이나, 위생이 중요한 카페에서 털이 날리는 애완동물을 안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함께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내 쫒아야 한다며 강경대응으로 나왔다.



아르바이트생은 똑 부러지게 일을 잘했다. 쫓아내야 할 사람은 쫓아냈고 밝게 웃어야 하는 상대에게는 밝게 웃어주는 등 자본주의 미소가 출중했다. 손님을 대할 때 미소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 나와는 달리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고 내가 음료를 만드는 일이 당연해졌다. 그걸로 된 거라 생각했다. 아무 갈등도 없는 최고의 팀.



그런 최고의 파트너인 그가 어느 날 쌓아왔던 불만을 말했다.



그때가 마침 정부에서 시행하는 '매장 내 일회용(플라스틱) 컵 사용 금지' 제도가 시작될 때였다. 넘쳐나는 플라스틱 폐기물로 지구가 위험하다며 카페 내 플라스틱 일회용 컵 사용 금지 캠페인이 차고 넘치던 시기였다. 당연히 카페에서 일하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일회용 컵을 사용 안 하는 만큼 설거지를 해야 하기에 힘이 든다. 그렇다고 돈을 더 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카페 노동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제도였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게다가 세상을 구하겠다는 내가 지구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지 않는다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이다. 내가 이 카페에서 일하는 이상 결단코 일회용 컵 사용은 없다. 점장님까지도 밤 8시가 지나면 단속도 안 나올 테니 플라스틱 컵 써도 된다고 하는 마당에 일개 직원이, 그것도 신입이 이를 거부하고 플라스틱 제로를 실천했다.



모든 건 정의를 위해서!



필요한 건 약간의 추가적인 노동뿐, 당연히 나 때문에 설거지를 더 해야 하는 아르바이트생은 불만이 가득했다. 물론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내가 다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바빠서 내가 못하면 아르바이트생이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불만이었는지 아르바이트생이 자기 힘들다며 플라스틱컵을 쓰자며 하소연을 했다. 불만이 엄청났었나 보다.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어필했다.



"응, 안돼!"



아주 괘씸했다. 설거지도 내가 다 해주는 판국에 뭐가 힘들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 괘씸한 건 그 이후부터 입이 튀어나오는 등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는 거다. 그럴 때마다 스튜어디스 준비 때문에 다이어트 해야 한다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라때를 먹였다. 우유 먹으면 살찐다며 거부해도 소용없다 이미 만들었다. 포동포동 살이 쪄라! 



라때아트 연습은 덤이다.



그래서였나? 벌을 받은 건가? 스튜어디스라는 꿈을 위해 노력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못 할 짓을 한 건가? 절대 아플 리 없는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우선, 발바닥이 너무 아팠다. 발바닥을 만져보니 사포질을 한 것 같이 맨질맨질하다. 뜨겁기는 얼마나 뜨겁던지 불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고작 9시간 일할 뿐인데 아플 리가 없다. 그런데 아프다.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평생 안 걸리던 감기도 걸렸다. 나는 그 미친 방송국 노가다를 하면서도 몸살 한 번 안 난 놈이며 비를 맞아가며 일을 해도 감기에 안 걸린 놈이다. 나는 원래 감기 안 걸린다. 초등학생 때 오리걸음으로 매일매일 운동장 10바퀴씩 돌고 겨울에는 스키장에 살다시피 하며 다져진 면역력이다. 세계 보건기구에서 내 피를 뽑아가 백신을 만들어야 할 판국이다.



그런 내가 감기에 걸렸다.



독감이 유행이라며 점장님이 조심하라 전해주기는 했었다. 하지만 나는 들은 채도 안 했다. 내게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직원 하나가 주방에서 콜록 일 때에도 속으로는 나약한 자식이라며 비웃기만 했다. 그런데 다음날 내가 독감에 걸렸다. 식기세척기가 뿜어대는 수증기에 증식한 바이러스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방은 전염병을 배양하는 인큐베이터나 다름이 없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



플라스틱 폐기물 때문에 지구가 위험하다는데 정말일까? 뭐, 정말이라고 치자.... 그런데 왜 그 수고스러움은 노동자가 감당해야 하는 거지? 환경오염은 다 같이 해놓고 그 책임은 특정 직업군에게 짊어 지우는 꼴이 너무 우습지 않나? 이건 마치 지금의 선진국들이 제국주의 시대 때 환경오염을 토대로 경제개발 해놓고 이제 와서 환경 보호랍시고 화석연료 쓰지 못하게 막는 거랑 뭐가 다른 거지? 법과 제도란 게 그런 거다. 강자의 입장에서, 강자의 시선에서, 강자의 편의대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 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I LOVE PLA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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