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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가다 뛰는 도련님 Oct 30. 2022

#17 나는 전생에 제갈량이었나 보다

세상 구하겠다는 내 꿈은 몇 점인가

새해가 되며 쇼케이스 위에 2019년 새해 달력이 놓였다. 첫 장, 둘 째장, 셋 째 장인 3월에 조그마하게 '200일 달성'이라고 써둔다.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다. 점장님을 두고 가야 하는 게 맘에 걸리지만 세상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사나이의 이별에는 눈물 한 방울 흘려서는 안 된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카페 바리스타 종료인 200일에 맞춰 어느 복지재단에 입사 지원서를 넣어둔 상태였다. 왠지 다음 직장은 사무직을 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더 나은 일자리를 얻고만 싶었다. 다음 일자리마저도 단순 노동이면 노동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두려웠다.



자소서를 쓰는데 이상하게 느낌이 좋았다. 해당 재단의 비전과 가치에 '도전'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는 세상 구하는 일이 '도전'에 영역에 들기 때문이었다. 스펙을 위한 도전도 아니고 보여주기 식 도전도 아닌 '진짜 도전' 말이다. 도전에 가치가 있다면 틀림없이 합격을 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류 통과와 1차 면접이 통과되며 마지막 최종 면접만이 남은 상태였다.



지원자는 나까지 총 4명 남았다.



마지막 최종 면접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최근 3년 동안 어떤 도전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다른 지원자 두 명은 솔직히 도전한 게 없다고 답을 했고 그나마 나머지 한 명도 학교 다니며 가방 만들었다는 도전 같지도 않은 도전을 말하였다. 반면 나는 세상을 구하는 도전 중이다.



면접관 입장에선 이보다 신선한 놈은 찾을 수가 없었을 거다.



게다가 카페 일을 하며 단순히 구인 모집 글 제목만 바꿔 망해가는 카페를 살린 일화는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또한, 내가 말솜씨가 있진 않아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면이 있기에 면접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그런 나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모양인지 가장 왼편에 앉아 계셨던 면접관은 혹시 시를 쓰냐며 묻기도 했다.



이대로는 합격이 확실해 보였다.



합격이라...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이곳에 합격하게 되면 세상 구하겠다는 나의 모험도 끝나버릴 것만 같은 예감 아닌 예감이 들었다. 내가 지원했던 복지재단은 일하기 굉장히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을 하게 되면 그 편안함과 미래에 대한 확신에 어떻게든 말뚝을 박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나는 세상 구하러 떠나야만 한다.



결국, 내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라며 그렇게... 면접을 끝냈다.



혹여나 합격할지 모른다는 희망도 작게나마 가져봤지만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거짓말이라고 한 지원자에게 합격을 줬다가는 채용비리라도 일어날지 모를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자폭을 해버렸다는 자책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지원한 사기업에는 잇다라 불합격을 하게 되었다.



세상 구하겠다는 자를 원하는 기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복지재단에 불합격한 게 너무나도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나의 모험이 끝나버리는 건가? 그런데 그때가 마침 어느 법무부 장관의 정치적 이슈가 터지며 '기회 평등'이라는 단어가 세간에 흘러나올 때였다. 그 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찌 보면 완전한 기회 평등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던데 진짜였다.



처음 방송국 노가다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단순히 <노동의 배신>의 작가를 따라 할 뿐이었다. 그 어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냥 그 작가가 했던 대로 따라 하다 보면 뭔가 보이겠지 하는 심경을 시작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목적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확실한 목적지가 생겼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바닥부터 이 나라의 정점에 올라보겠다.



운명을 느꼈다.



세상을 구할 길을 보았다. 보이지 않던, 끝없는 공허 끝에 세상을 구하겠다는 꿈의 종착지가 보였다. 그리고 나라면 할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어쩌면 나의 삶이 그토록 방황이었던 건 오늘을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는 영화의 한 순간을 보았다. 그때 영화는 이걸 '운명'이라 말했다. 세상을 구하는 용사의 운명,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이 각성하는 순간 말이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본 유비의 심경이 이러했을까?



아무래도 난 전생에 제갈량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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