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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가다 뛰는 도련님 Oct 15. 2023

#23 나는 세상을 구하지 못했다

세상 구하겠다는 내 꿈은 몇 점인가

안성의 신축공사 현장이었다. 갑작스럽게 현장 주차장이 폐쇄되어 200m나 떨어진 다른 주차장에서 자재며 장비들을 들고 와야 했다. 문제는 길바닥이 비포장이기에 바퀴를 굴려 옮기는 행위가 여의치 않았다. 장비는 어찌어찌 손으로 들고 온다 치더라도 파손 위험이 있는 유리 공사 업체는 욕을 한 사발 후 왔던 길을 돌아갔다. 당연히 공사 관계자들이 모인 단톡방에는 사람들의 불만과 원성이 터져버렸다. 이게 뭐하는거냐며, 자재나 장비는 현장 앞에서 내리게 해 달라는 등 야단들이었다. 그중 내 눈길을 끄는 한 문구가 있었다.



"힘든 일 하는 사람들이라고 힘들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는 모자만 보아도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높으신 분들 한눈에 알아보고 실수하지 말라는 당대의 사회적 배려가 아닌가 싶다. 공사장에서도 모자만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다. 수백 수천 명의 작업자가 뒤엉키기는 게 공사장이기 때문에 혹시나 서로가 실수라도 할까 봐 안전모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 혈액형 등 개인신상정보를 써 붙인다. 사고 시 빠른 행정처리와 수혈이 목적이라 말하겠지만 VIP라고 적힌 모자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시대가 변하며 신분제도가 없어졌을 뿐,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군대 때에도 장군님 오신다 하면 청소해야 했는데 건설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회장님 온다 하면 일단 청소부터 해야 한다. 복도에 쌓아둔 폐기물을 치우고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 회장님 오시는 시간에는 작업을 하지 말라고 지침이 내려온다. 어느 곳에서는 회장님 발 더러워질까 바닥에 천 때기도 깔아 둔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이 문제에는 다들 불만이 없다. 익숙하고 당연한 거다. 인간은 문명을 이루고 여러 사회 제도를 도입했다며 자화자찬하지만 갑이 을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거다.



"갑을병정 중 우리는 병이다."



회사 팀장님이 내게 해준 말이다. 원청은 갑, 대행사는 을, 인테리어 업체인 우리는 병, 작업자는 정, 너무나도 알기 쉬운 세상구조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위험한 일일 수록 하청이 도맡는다. 돈이 원수라고 그 어떤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현장에 있는 우리는 주말밤낮없이 일하는데 대기업 직원은 주말에 카톡조차 받지 않으려 한다. 그 카톡을 받지 않으면 월요일날 몰아서 보내야하는데 그게 또 일이다. 내가 일처리를 해달라는것도 아니고 받아만 두고 월요일날 처리하면 되는건데 그게 뭐 그리 힘들다는 건지 계속 협조 해달라는 말 뿐이다. 세상은 주 52시간을 넘어 주 4일제를 말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주말도 없는 주 7일제이다.



나와 그들의 격차가 너무나도 수치스럽다.



그렇게 시끄러웠던 중대재해 처벌법도 정작 회장님은 비켜간다. 대신, 나 같은 중간 관리자만 죽어난다. 회장님들 감옥 안보내드리기 위해 각종 서류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류에 첨부할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 불러 모을 때마다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안전사고가 날 경우 책임지겠다는 서명을 할 때마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커진다. 반항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내 눈 앞에 나를 상대하는 자들도 을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공사를 끝내가니 어느덧 300일이 다가왔다.



처음 인테리어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300일만 할 요량이었다. 그래야 100,200,300일씩 근무했다는 깔맞춤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사리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본래 계획은 세상 구하겠다는 멋진 도전을 한 청년이 얼마나 대단한 기업에 입사하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이대로는 그냥 백수일게 분명하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추상적인 가치말고 내가 기업에 필요한 인재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했다. 객관적인 근거... 그때 회사 쪽에서 내게 연락이 왔다.



어느덧 연봉협상 시즌이 다가온 거다.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게 신입인 내가 연봉을 1년 차에 연봉을 1.000만 높이면 내가 일을 잘하는 놈이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참고로 통산적으로 이 업계에서 1년 차는 200~300만 원을 올린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1.000만 원을 올리면 그냥 끝난 거다. 어떤 기업인사든 뚫어버릴 초필살기가 생겨버리게 되는 것이다.



당당하게 1.000만 원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참 말도 안 되는 요구이긴 하지만 말이 안 되지만은 않았다. 나 하나 있으면 한 달에 하나씩 공사를 해치우는 시기였다. 공사 한 개당 이윤이 2천이라 생각하면 1년 동안 내가 회사에 벌어주는 돈이 적어도 2억이라는 뜻이다. 그 2억이라는 금액이 오로시 나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지만 내가 요구하는 연봉을 줘도 회사가 결코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이건 기세 싸움이다. 곧 죽어도 GO다.



쫄리는 쪽이 뒈지는 거다.


 

그리곤 얼마 후 회사 쪽에서 나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1년 차 연봉 1.000만 원 인상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세상 구하겠다는 자가 단순한 이상론자가 아닌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연봉이라는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해 내었다. 이제 이 회사에 볼 일은 없다. 깔끔하게 400일까지만 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만두었다. 그렇게 나는 전설이 되었고 더 큰 레전드가 되기 위해 국회를 찾아갔다. 함께 세상을 구하자며...



때는 바야흐로 20대 대선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시대정신이라는 게 있다. 탄핵정국이었던 지난 대선의 시대정신은 분명 '공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공정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공정이라는 건 결국 약육강식이다.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가치로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 지배체계를 공고히 하는 것, 내가 바라본 공정이라는 가치의 이면이다. 내가 바라본 노동 시장이 그러했다. 노동자는 언제나 약자로 강자가 만든 규칙대로 움직여야 한다. 정작 그 규칙을 만든 강자는 지키지도 지킬 필요도 없다. 그것을 사람들은 불공정이라 말하지만 어차피 세상의 규칙은 강자가 만든다. 즉, 불공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게 약육강식이니 말이다.



이 나라는 다른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나의 이야기는 다음 시대정신을 제시한다. 나는 꿈을 꾸었고 그 꿈으로 희망을 보여준다. 돈이 최고인 욕망의 시대에서 낭만을 말한다. 그런 나의 이야기를 대선이라는 무대를 통해 홍보한다. 대선 후보들은 내 이야기로 자신을 이미지 메이킹하고 나는 10원 하나 쓰지 않고 내 이야기를 전 국민에게 홍보한다. 모든 게 완벽하다. 매주 토요일마다 두 달을 찾아가서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결과는? 아무도 관심 가져주질 않았다.

 


나는 그냥 흔한 미친놈일 뿐이었다.



뭐, 상관은 없다. 아주 좋은 홍보 수단을 잃었을 뿐 내가 할 일은 처음부터 좋은 기업에 취업함을 보여 모든 청년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나의 성공은 또 다른 나를 만든다. 말 그대로 나는 ICON이 된다. 게다가 내게는 연봉 1.000이라는 초 필살기가 있다. 필살기만 쏘면 다 끝난다. 누가 뭐래도 난 기업이 원하는 돈 잘 벌어다 주는 일 잘하는 놈이다. 혹시라도 믿지 못 할까봐 월급명세서를 들고 다니며 면접을 봤다. 이거 보라고 나 일 잘한다고, 그냥 닥치고 뽑아라.



  "세상 구하겠다는 내 꿈은 몇 점인가?"



내 이력서의 제목이다. 다시 봐도 제목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았다. 나보다 눈길을 끄는 이력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소개서도 특이하다. 실제 내 자기소개서는 이 글의 '서문'이다. 생긴 것도 너무 멋지다. 날 주목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모두의 이목이 쏠렸을 때 필살기를 쏜다. 마인부우를 해치우기 위해 손오공이 지구인 모두의 기를 받아 원기옥을 만든 것처럼 함께 일했던 모든 이의 소망을 담아 발사했다. 명중이다. 폭발의 충격으로 먼지가 자욱하다. 면접관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음이 분명하다. 그랬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 구하겠다는 자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인재는 노예였다.

  


대학 졸업 당시 정년퇴직을 앞둔 노교수님이 마지막 강연때 해주신 말씀이 있으셨다. 자신의 삶에서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존경할 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 구하는 모험을 떠나면 마지막에는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봤던 만화나 영화에서는 언제나 그러했다.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는 모험을 떠나면 존경할 스승을 만나고 사랑할 자를 만나 해치엔딩을 이룬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랑할 자도, 존경할 자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세상을 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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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많이 하지않은게 후회스럽다.


100년 전, 나라를 빼앗겼을 때 그런 나라를 되찾겠다고 싸웠던 독립운동가 처럼 100후 인구소멸로 나라가 사라지는걸 막고 싶었다. 듣기에는 좋은 소리지만 이 나라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굶어 죽고 조상님이 나라 팔아먹은 재산으로 그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사는게 이 나라의 역사다.


나는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다음 세대를 결정 짓는건 환경이라 말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환경은 일자리이다. 어떤 사람을 뽑는가로 다음 세대가 결정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다음 세대가 없다. 초저출산, 이 나라는 인사가 잘못 되었다.  세상 구하겠다며 발버둥치는것보다 자격증 하나가 더 값지다. 아무리 손맛을 내려해도 조미료는 이기지 못한다. 이나라 인사는 공정이라는 변명으로 기회주의자에게 기회를 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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