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부산으로 출장을 가야 했다. 면접 때 지방 출장 가능 여부를 물어본 게 이 때문인 거 같다. 어지간히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출장 보내는 걸 보니 말이다. 어느 정도 출장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리도 곧바로 가게 될 줄 몰랐던 나 역시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못 가겠다고 말도 못 하겠다. 어차피 가야한다. 그나마 부산까지 편하게 가라고 SRT 타라며 법인카드를 준다.
참으로 영롱한 게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카드다.
약속장소인 부산의 어느 백화점 앞에서 회사 과장을 만나 간단한 인사를 한다. 그리곤 곧바로 백화점 어느 방안에서 미팅이 시작된다. 나는 신입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부산을 가라해서 왔다.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내가 앞으로 무얼할지도 나는 모른다. 그런 내가 미팅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만 꿈뻑꿈뻑하며 상대가 나를 보지 않게 만드는 것 뿐이다. 행여나 나한테 뭘 물으면 사고다.
"너는 왜 이런 몸 쓰는 일을 하게 됐냐"
미팅을 무사히 마치고 근처 부대찌개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회사 과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 구하는 나의 모험 이야기를 꺼냈다. 정답이 존재하는 정답 사회에서, 정답이 따로 존재함이 아님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이 세상 정점에 서보여 세상을 구해내겠다는 나의 각오를 들려줬다. 보통 이 정도 말하면 반응이 와야 하는데 별 반응이 없다. 그의 관심사는 내가 이 일을 얼마큼 할지 뿐이다. 내가 중간에 그만두면 자기가 내 몫의 일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밤, 곧바로 밤샘 철거 작업이 진행됐다.
인테리어의 시작은 언제나 철거부터 시작한다. 백화점 바닥과 벽체, 천장을 깨 부스며 발생하는 먼지와 땀에 KF-94 마스크는 얼마 못 가 그 기능을 상실한다. 먼지가 얼마나 일어나던지 머리와 눈썹이 온통 회색눈이 내려앉으며 회색인간이 되어버릴 정도이다. 이 정도 먼지가 일어나면 환기를 해야 하는데 사방이 가설벽체로 둘러싸인 공간이기에 환기도 불가능하다. 백화점 환기 시스템으로 먼지를 외부로 뺄 수는 있지만 공조시스템에 먼지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백화점이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공조시스템으로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끔 비닐로 막아둔 채 공사를 진행한다.
당연히 먼지 자욱한 밀폐된 공간에서 일을 하는 건 몸에 좋지 않다. 각종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업환경 개선 차원에서 먼지를 빨아들이는 집진기를 공사구간에 가져다 둬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 무거운 집진기를 현장까지 가져다 두기는 하지만 가동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집진기가 전기를 많이 먹기 때문이다. 백화점이 제공하는 전기 허용량으로는 철거 작업에 사용되는 장비와 집진기를 동시에 가동하지 못한다.
결국, 집진기는 사진만 찍어 서류에 올리는 전시용으로 전락한다.
결국, 자신의 호흡기를 지킬 유일한 수단은 마스크를 착용하는 건데 작업자 상당수가 마스크조차 착용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못한다. 환기가 되지 않는 갇힌 공간이기에 작업을 하며 발생하는 열도 갇혀버린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다. 그 상태에서 마스크를 쓰고 일한다는 건 탁상행정이다. 게다가 철거 작업에 동원되는 상당수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이래저래 철거 업체는 마스크 비용까지 아낄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만 안전모와 마스크를 쓰고 있다.
회사 과장은 철거 작업이 진행되는 3일 동안 철거 사장에게 작업지시만 내린 후 특이사항이 없으면 숙소로 들어간다. 자연스레 철거 작업이 끝나는 다음날 아침까지 내가 현장 책임자가 된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다. 철거 사장이 자꾸만 나한테 공사 중 발생하는 문제를 두고 어찌하냐고 물어보는데 참으로 죽을 맛이다. 모른다고! 그런데 나는 공사 중 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서명하지 않으면 공사 자체가 불가능하다.
공사를 시작하며 처음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책임은 '을'이 지게끔 만들어 둔다는 것이다. 백화점은 각종 사고에 대비하여 각종 서명을 받아 둔다. 자신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말이다. 뭐 그리 서명할 게 많은지 공사 시작도 전에 서명을 하다 진이 빠질 정도이다. 안전교육 관리대장, 화기 작업 관리대장, 안전일지, 고소작업 안전수칙, 전기 작업 안전 수칙, CCTV 촬영 동의서, 출입자 명단, 모두 다 하나같이 내게 책임 전가 시키겠다는 말 뿐이다.
서류 제출하기도 참으로 힘들게 만들어 놨다.
수많은 서류 중에는 다음날 어떤 작업을 하겠다는 작업계가 있는데 이건 제출하는 것도 골 때리게 만들어놨다. 우선 1층 안전실에서 서류를 받아 파트리더에게 서명을 받아야 한다. 당시 파트리더가 있는 영업팀은 6층이었다. 두 번째는 지하 2층에 있다는 방재실 서명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난이도가 올라간다. 보통 방재실은 지하 기계실 어느 구석진 곳에 있는데 안내표지판 하나 없는 곳을 알아서 찾아가야 한다. 세 번째는 12층에 위치한 전기실 서명을 받아야 한다. 물론 이곳도 표지판이 없어서 알아서 찾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1층 안전실에 제출한다.
물론, 아무도 나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매일매일 작업계 제출을 위해 1층>6층> 지하 2층>12층>1층, 이 짓을 매일 해야 한다. 인터넷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나라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시스템을 이렇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백화점은 내게 책임은 짊어지게 하고는 싶지만 그 책임을 위한 행동을 취하기 힘들게 만든다. 그들이 말하는 안전을 이행하려면 그 일을 해야하는데 공사장이 더럽다며 매일같이 청소하라며 야단들이다.
하이라이트는 근무시간이다.
백화점이라는 특성상 자재를 올리거나 공사 중 발생하는 폐자재를 반출하는 일은 전부 야간에 진행해야 한다. 고객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매출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간작업은 수시로 이뤄진다. 보통 야간작업은 일찍 끝나면 저녁 12시, 늦게 끝나면 새벽 4시이다. 정상적인 근로조건이면 다음날은 쉬는 게 맞지만 점심시간 전까지 다시 출근해야 한다. 언제나 사람은 부족하고 일은 많기 때문이다. 백화점이 요구하는 일을 다 하기 위해선 4명은 필요하지만 중소기업에서 그럴 여력은 없다.
과장과 나, 2명이 끝이다.
과장은 이번 공사 끝나면 쉰다고 했지만 공사가 끝나면 다른 공사가 연이어 시작했고 그 후에도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3연속 공사가 이뤄지며 3달 후에나 쉴 수 있었다. 나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일을 했다. 말 그대로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물론 야간수당, 초과근무 수당, 출장비 따위도 없다. 3달 후 사무실로 돌아와 내 앞에 놓인건 내가 서명하지 않은 나의 지난 휴가 신청서였다. 나는 쉬지 않았지만 서류상으로 쉰 걸로 처리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싫었냐고? 아니! 짜릿했다.
이 정도는 해줘야 세상 구할 맛이 나지, 얼마든지 받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