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과 틀린 것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가만히 보니 열 발가락을 다 내놓은 조리를 신었다.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가라며 말렸다. 조리가 왜 안 되느냐고 물으면 단정한 옷차림으로 학교에 가야한다고 설명했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이들은 그 후로도 가끔 조리를 신고 학교에 가려는 거사를 시도했다. 결국, 아이들이 꺼낸 말은 다른 아이들은 다 조리 신고 학교에 온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 발을 디뎠을 때 아이들은 여덟 살, 다섯 살이었다. 여러 가지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처음 아이들과 의견차이가 심각했던 점이 바로 조리였다. 값도 싸고 제법 튼튼해서 아이들이 즐겨 신는 신발. 그래도 학교에 신고 가려 할 때는 예의 없어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대학 시절, 늘 조리를 신고 다니던 남학생이 있었다. 털이 숭숭한 맨발에 조리 하나를 걸치고, 나 좀 보라는 듯, 늘 바닥에 찍찍 끌리는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우리가 갈망했던 건 발가락의 자유는 아니었는데. 다른 방식의 자유를 찾아보라고 진심으로 권하고 싶었다. 검정 양말에 짚신을 신고 다니던, 연극을 하던 친구의 패션 감각이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던 어느 여름날, 아이들의 학교에 갔다. 교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원색의 조리들이 와르르 몰려나왔다. 온몸으로 거부하던 동방예의지국 백성의 자존심이 조리의 거센 물결 앞에 두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어느 교수님의 유머가 떠올랐다. 학창 시절 자기는 'r' 발음을 고의적으로 연습하지 않았단다. 자기에게 있어서 그 발음을 연습한다는 것이 미 제국주의에 투항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나. 시애틀에 사는 한국 아줌마인 나에게 조리란 그 영문과 교수님의 'r' 발음과 비슷한 관계다. 얄밉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
어느 무더운 여름, 뉴욕으로 여행을 떠났다. 발에 잘 맞지 않는 신을 신고 갔다가 어찌나 고생했는지, 아무 신이나 사려고 가까운 가게에 불쑥 들어갔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는데 신발이라곤 조리뿐이었다. 게다가 색상은 꽃분홍과 옥색뿐이었다. 난감했지만, 일단 고생하는 발을 구해야했다. 조리를 신고 걸어보니 발이 날아갈 듯 가볍고 시원했다. 그 순간 얄밉던 물건이 어찌나 고마워지는지 대견해서 자꾸 쳐다보았다. 조리가 제공한 마이애미 바다색의 일탈에 히죽히죽 실없이 웃음이 났다. 사람의 마음이란, 얕은 물처럼 이리도 찰랑거리다니. 겨우 발목도 못 담글 깊이다.
더위가 어슬렁대는 인디언 섬머에 아까운 햇볕을 즐겨 보기로 했다. 물결 이는 바다로 낚싯줄을 던져 넣었다. 줄을 팽팽히 당겨 맞은 편 산등성이에 얹어놓고 소식이 오길 기다렸다. 조리 신은 내 발을 자갈이 가득한 해변 위에 올려놓았다. 파도가 밀려들면 맑은 바닷물이 발가락 사이사이로 뼛속까지 들어오는 듯하다. 점점 차올라 종아리까지 시원해진다. 자갈들 사이로 물이 스며들었다가 빠져나가면 자갈들은 왜글왜글 수다를 떨었다. 눈먼 물고기도 한 마리 건지지 못했지만, 마음은 잔잔한 기쁨에 젖었다. 머릿속도 덩달아 맑아지는 바닷물 마사지의 기억은 조리에 대한 거부감을 호감으로 바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넓은 바다를 건너온 이국의 문화 속에서 다른 것과 틀린 것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초콜릿으로 덮은 딸기, 청어피클이나 블루치즈를 보면 한번 먹어 볼까?하는 생각보다 눈살부터 찌푸렸다. 남의 문을 열어 기웃거려보지 않으려는 고집, 게다가 덥석덥석 먹어가는 나이도 한몫했다. 익숙해지고 편한 것을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김치에 중독된 파란 눈의 엘리자베스도 처음엔 나와 같이 당황했을까? 오래전 한국인 친구가 종종 건네준 작은 유리병에 담긴 괴상한 냄새가 나는 음식. 스리슬쩍 그 맛에 사로잡혀 버렸다며, 환하게 웃었다. 요즘도 가끔 한국 식품점에서 그녀와 마주친다. 김칫국물에 밥 말아 먹었다고 아침 메뉴를 자랑하던 팔순이 넘은 귀여운 그녀. 카트 속엔 젓갈이랑 배추랑 김치 만들 재료들이 가지런했다. 그녀와 마주 선 내 발엔 열 발가락을 자랑하는 조리 한 켤레. 마이애미 바다색이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