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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Sep 0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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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

   버스가 덕수궁 앞을 지날 때마다 나만의 예식을 치렀다. 눈이 좇는 것은 전시회 포스터가 안내하는 궁의 안쪽이 아니었다. 돌담의 바깥쪽을 따라 이어진 길을 목을 빼고 내다보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버스는 길의 초입을 잠시 보여주곤 쏜살같이 출발했다. 고풍스러운 돌담을 배경으로 다정히 걷는 연인들을 보며 언젠가는 누군가와 그 길을 걷고 싶다고 단발머리 소녀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덕수궁 돌담길도 못 걸어보고 결혼을 했네. 나의 말에 남편은 결혼 전 둘이서 그 길을 걸었다고 했다. 처음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시간에 쫓겨 서둘러 걷고 있었고 보도블록이 고르지 않아 힐이 있는 구두로 걷느라 진땀을 뺐다. 그 시절 우리는 바쁜 것이 훈장인 줄 알았고 다시 못 올 순간들을 소중하게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어릴 적 희망사항이 이미 이루어졌건만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시, 어느 장소에서 일어난 사실과 그것이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젊은 날의 시간은 늘 그렇게 빨리 따라오라고 나를 재촉했다. 결혼 후 10년 동안 나는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정규수업, 보충수업, 야간 자율학습 감독도 했다. 퇴근 후 가방 안에서 집 열쇠를 찾는 몇 초의 순간도 견디기 힘들만큼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바닥나버렸다. 종일 잠을 자보는 것이 소원이 되고, 늘 감기와 인후염을 달고 살았다. 

   그 시절, 기억나는 일탈이 있다. 어느 공휴일,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집을 나왔다. 서점에 들러 책 한권을 사고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찻집의 문을 열었다. 구석에 자리를 정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에 감동했다면 좋으련만, 나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붙들고 있었다. 조용한 찻집에서 몇 시간 동안 혼자 책장을 넘기는 나는 돌아온 문명인이었다. 커피 두 잔을 마시고 난 뒤 친절한 웨이트리스가 내 빈 잔에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을 때도 코끝이 찡했다. 꼭 안아주고 싶은 기억 속의 나였다. 

   올 봄 남편과 함께 팔루스 폭포에 갔다. 계곡 옆 가파른 바위에 사람들이 새겨놓은 이름과 이니셜, 그리고 하트 모양이 빼곡했다. 우리도 한 글자 새길까? 하다 번득 눈앞을 가로막는 문구가 있었다. “가지고 가는 것은 추억만을, 남기고 가는 것은 발자국만을.” 오래전 백담사 계곡으로 들어설 때 만난 글귀다. 내 손으로 훼손한 자연으로 몸이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로 했다. 

   기억은 아무 자취가 없는 자산이다. 소중한 기억이 많을수록 남은 생은 부유할 것이다. 이 자산이 넉넉하다는 말은 부여된 시간, 코끝에 호흡, 건강과 젊음,  지나온 만남들을 귀하게 여겼다는 말이겠다. 나의 오늘은 먼 훗날 돌아보고 싶은 기억으로 남게 될까? 덕수궁 돌담길을 불러내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할 기회가 올까? 그렇다면 그 기억은 어떤 새 이름을 갖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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