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과 감정의 시선으로 본 바르트의 렌즈, 카메라 루시다 이론을 중심으로
"삼등선실(The Steerage, 1907)"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찍은 사진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작가의 사상을 스트레이트 포토 형식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다. 사진은 계급을 상,하 구조로 나누어 적나라하게 계층 구조를 드러낸다.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의 의복 차림부터, 그들이 탑승 중인 배의 층, 그리고 그들의 시선 구조 등을 통하여 당대 시대의 계급 구조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이 사진을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이론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바르트의 이론에서 중요한 개념으로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 있다. 이 두 개념을 적용하여 "삼등선실"이 어떻게 관계성과 감정적 충격을 통해 사진의 의미를 전달하는지 탐구하며, 계급 구조에 대한 개인적 고찰과 더불어 “오퍼레이터(operator)," "스펙트럼(spectrum)," "관객(spectator)"이 각각 이 사진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바를 알아보고자 한다.
“삼등선실"은 다양한 사회적 계층과 출신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함께 모여있는 풍경을 담고 있다. 이 다양성은 바르트의 스투디움의 개념과 연관지을 수 있다. 여러 인물들의 모임은 일반적인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끄는 특징으로, 스투디움의 측면에서 이 작품이 어떻게 관계성을 나타내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각 층의 구조를 통하여 사진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도출해낼 수 있다. 2층에 있는 승객들은 상대적으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의복들을 착용 중이다. 아울러 아래층에 있는 승객들을 내려다보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1층의 승객들은 2층 승객에 비하여 허름한 의복들을 착용 중이며, 고개를 숙이거나 그저 앞을 바라보는 시선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가장 먼저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2층의 승객들은 부유 계층이며, 1층의 승객들은 하층민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로, 2층의 승객들은 대부분 서 있으며, 1층의 승객들은 대부분 앉아있는 현상을 확인 가능하다. 이는 하층민의 고된 노동과 생활고로 더 이상 서 있기 힘들어 그저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포함을 추론할 수 있다. 반면 2층의 부유층 승객들은 대부분 일어선 채 1층의 승객들을 내려다보거나,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확인 가능하다. 이를 통하여 당대 계층의 사람들의 생활 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셋째로, 사진 한 가운데에 위치한 다리 또한 매우 큰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들의 사이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는 다리는 두 계층 간의 단절감을 표상할 수 있다. ‘다리’란 본디 이어져 있어 오갈 수 있음을 드러내는 매개로 이용되지만, 이 다리는 입구가 막혀있으며, 출구는 사진의 프레임 밖으로 잘린 상황이다. 아울러 사진 가장 우측에 위치한 다리 또한 올라가는 입구가 프레임 밖으로 잘렸다. 이러한 사진 구조는 모두 1층의 하층민들은 2층의 부유층의 칸으로 결코 올라갈 수 없다는 단절감을 드러낸다. 더욱 나아가자면, 이러한 현실에 지쳐버린 1층의 하층민들은 올라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1층에 안주하여 주저앉아 버렸다는 사실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푼크툼은 사진 속에서 감정적 충격을 주는 작은 세부 사항을 의미한다. "삼등선실"에서는 각 인물들의 얼굴이나 자세, 배경 등에서 특별한 푼크툼을 찾아낼 수 있다. 어떤 부분이 강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세부 사항으로서 작용하는지 확인하면, 푼크툼의 측면에서 이 작품이 어떻게 감정적 충격을 전달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1층 선실에 앉아 히잡을 머리에서 벗어던친 채 산발이 된 머리 한 편을 괴고 앉아 있는 여성을 보라. 그리고 그 여성의 바로 위, 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를 쓰지 않은 여성을 보라. 두 사람은 거의 유일하게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쓰지 않은 인물들이다. 1층의 여성은 산발이 된 머리를 그저 풀어헤친 채, 낙심한 표정으로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2층의 여성은 모자를 쓰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묶어 올린 머리를 하고, 아이를 안아든 채 1층의 여성과 비슷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두 여성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더불어 비슷한 지점을 함께 응시 중이다. 이 시선의 끝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프레임에 잘려 나오지 않았지만, 이 시선의 끝에는 두 사람의 계층을 가로막고 있는 다리의 종점 부분에 다다를 것이다. 1900년대는 계층에 관계 없이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기였다. 두 여성은 계층은 다르지만, 각자의 고충이 있었으리라. 1층의 여성은 하층민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개탄으로 이러한 계층을 증오했을 것이다. 2층의 여성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아이를 양육하고, 자신의 남편과 집안의 요청에 맞게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는 자유란 존재치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1층의 하층민들이 자신의 삶에 맞추어 유랑하는 삶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녀들은 자신의 지위를 속박하는 것의 대상인 모자를 벗어던지고 이러한 계층을 뒤바꾸고자 하는 욕구로 선실의 끝에 다다른 계층의 벽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현재에는 계급이 존재치 않지만, 스티글리츠가 사진을 촬영하던 약 100년도 더 전인 1907년엔 분명히 계급이-존재-했다. 당시의 인물들의 의복과 선실로 아주 적나라하게 이러한 양상을 확인해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물들의 표정과 시선 처리 등을 통하여 이러한 계급주의에 대한 불만과 개선 의지 등을 꾀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러한 사진을 촬영하던 오퍼레이터(operator) 스티글리츠는 불균형한 인간의 사다리꼴 모양에서 자본주의와 계급사회의 인간 군상을 떠올리며 스투디움들을 필름 속에 잔뜩 담았을 것이다. 스펙트럼(spectrum) 또한 1907년대의 계급 사회 인물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100년 후의 나에게 도달하도록 도왔을 것이며 말이다.
관객(spectator)인 ‘나’는 이 사진을 통하여 지시체의 본질을 느꼈다. 사진은 더 이상 매체나 기호가 아닌, 사물 ‘자체’이다. 또한 모든 사진은 ‘언어’이다 교수님께서 강의 중 강조하셨던 내용이다. 더 나아가, 사진은 지시체를 덮고 있는 ‘투명한 봉투’이며, 사진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이러한 사진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비친 것은 사진이 아닌, 그곳에 재현된 대상인 지시체다. 본인은 이 리포트를 작성하며 투명한 봉투를 벗겨내진 못했으나, 돋보기를 들어 햇볕을 모아 비닐을 태우는 정도의 노력을 했으리라 자부한다. 사진을 열심히 뜯어보았다. 수도 없이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고, 좋아하는 것이 스투디움이라면, 난 이 사진을 사랑했다. 교재에 적혀있던 푼크툼의 정의, 사랑하기(love)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로써 깨달았다. 나는 이 사진을 통하여 인류애를 경험했다. 인간이 서로 무언가의 규칙으로 만들어낸 계층, 그리고 그 계층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 모두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서로 헐뜯고 서로 간의 층고가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 일인가. 사진에서 서로의 위치에 묵묵히 위치한 채 이러한 계급의 개혁 의지를 두 눈빛으로 드러낸 두 여성에게 약 100년 뒤의 후손인 내가 전해주고 싶다. 이젠, 함께 앉아있을 수 있다고.
“삼등선실(The Steerage, 1907)"은 단순한 사진이 아닌,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미술적 표현과 롤랑 바르트의 이론을 통한 해석을 통해 깊은 의미를 전하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스투디움과 푼크툼, 그리고 "그것이-존재-했음"의 개념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계급 구조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관객에게 감정적인 충격과 인류애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스투디움의 측면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함께 모여있는 풍경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다양성과 계급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각 계층의 특징적인 의복, 자세, 시선 등을 통해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과 당시의 계급 구조를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사진 구조 자체가 묘사하는 계급 간의 단절감은 다채로운 시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푼크툼의 측면에서는 작은 세부 사항을 통해 감정적 충격을 주는데, 사진 속 여성들의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은 계급에 대한 불만과 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두 여성의 공통된 시선이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강조하며, 그들의 욕망과 희망이 담겨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것이-존재-했음"의 개념은 현재와 과거 간의 대비를 통해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다. 현재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지만, 1907년 당시의 계급 구조는 사진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르트가 강조한 대로, 사진은 더 이상 매체가 아닌 사물 '자체'이며, "삼등선실"은 그 당시의 현실이 현대 관객에게 묵직하게 다가가는 예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우리에게 당시의 계급 구조와 사회적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인류애와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삼등선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우리에게 사회적 변화와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며, 예술이 지닌 힘을 다양한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