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원 박사 과정 랩실 발표가 있었다. 그동안 내가 연구한 부분에 대해 교수님과 같은 랩실의 대학원생들에게 발표하는 자리였다. 나는 공공부문에 AI를 도입하여 행정 혁신을 이루는 것에 관심이 있다. 올해부터 일과 후 시간과 주말을 활용하여 NIA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한국행정연구원, SPRI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등 국책연구기관의 자료와 인공지능 관련 논문, 포럼 등을 찾아보며 틈틈이 자료를 정리했다. 공공부문 인공지능 도입과 관련하여 연구 질문, 가설, 이론, 분석 방법 등을 정리했고, 이를 바탕으로 나름 설득력 있게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발표 당일, 여전히 준비는 부족했다. 발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연습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또다시 어설픈 준비로 발표에 임했고, 예상대로 교수님의 피드백은 좋지 않았다. NIA 자료의 문제점들(AI 거버넌스, 데이터, 기술/인프라, 조직/인력 등)과 컨조인트 분석(여러 속성을 가진 제품이나 서비스에서 사람들이 어떤 조합을 가장 선호하는지, 각 속성이 선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는 조사 및 분석 방법)의 속성들(도입 및 운영 방식, 데이터 통제/활용 범위, 핵심 기능 수준, 총 사업비) 간에 명확한 관계 설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연구 문제에 대해서도 사전 편찬식으로 나열하는 수준을 넘어, 해결하고자 하는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연구 질문 또한 날카롭지 못하고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셨으며, 연구 방법론으로 제시한 컨조인트 분석의 주요 속성들이 진정성 있는 고민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셨다.
돌이켜보니 나는 전략적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공부가 부족했던 것이다. 선행 연구들을 읽고 정리해서 발표 자료 없이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마치 요리사가 재료를 자유자재로 다뤄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내듯 말이다. 생각해보면, 빠르게 선행 연구를 준비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압박감에 차근차근 자료를 읽고 정리하지 못했다. 자꾸 새로운 것, 더 많은 자료를 보려는 욕심만 앞서 있었던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다. 시간이 없고 마음이 급할수록 서두르다 실수하기 쉬우니, 오히려 여유를 갖고 차분하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김도영 작가는 그의 책 『기획의 말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슬럼프를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는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기부터 다시 익히는 것이라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디폴트, 즉 기본기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순간이 바로 슬럼프라고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지 않고, 곧바로 뾰족한 연구 문제와 연구 질문, 연구 방법을 찾으려고만 했다. 기본기가 없는 상태에서 자꾸 결과물을 만들려고 하니, 모래 위에 지은 누각처럼 튼튼하지 않았던 것이다.
업무도 마찬가지다. 내가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질문이나 반문을 받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명확하게 업무를 지시할 수 없고, 명확한 업무 지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직 내 소통과 신뢰가 깨진다. 내가 제대로 알고 있을 때, 비로소 수십 장의 보고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고, 한 장의 보고서로 작성할 수 있다. 자신의 업무를 완벽히 장악한 사람은 핵심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보고받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지 알며, 쉽게 이해되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만들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조용민 대표는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 '일도 잘하고, 기회도 잡고, 돈도 버는 능력을 봉인 해제하려면'에서 '끈질긴 문제의식'에 대해 말했다. 그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성공적인 혁신과 성장을 위한 태도로 "문제를 표면적으로만 파악하고 타협하지 말고, 문제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AI를 잘 쓰려면 좋은 질문, 즉 프롬프팅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AI 기술을 아무리 열심히 익히고 배워도 자기 고민을 해결하는 데 그 기능을 엮지 못하는 AI는 보배가 아니라 그저 뿔뿔이 흩어져 굴러다니는 장난감 구슬에 불과하다."(조용민의 저서 『AI 언락』, p. 91)
단단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되물어봐야 한다. '나는 내 이름에 걸맞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기준을 갖고 있을 때, 쉽고 빠른 길을 찾지 않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기초를 다지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진정한 고수가 되려면 내가 풀려는 문제에 대한 끈질긴 고민, 그리고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