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뤄두었던 치질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옆에는 하루 전에 입원했다는 젊은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전화 통화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중견 사원이었다.
음~ 잘 사귀어 봐야지!
언제부터인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면, 학생들의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인가부터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우연한 만남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신뢰의 관계로 이어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연을 중시했지만, 요즘에는 예의를 갖추어 한 번 스쳐가는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퇴원 후 한 부장과 조심스레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수술 후 한 달이 지났을 때 한 부장으로부터 부부모임을 하자는 전화가 왔다. 아내도 기꺼이 동참했다. 내가 단골로 다니던 일식집 바에서 정종을 마시고, 한 부장이 잘 가는 맥주 집에도 갔다.
그렇게 소중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수시채용을 하니 학생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한 부장의 마음이 고맙다. 진심은 다 통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 잘 통한다.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의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난다. 어느 해 여름 모교 은사님을 부산에 초청했다. 그런데 여름 성수기 여서 호텔 값이 너무 비쌌다. 싼 모텔 방은 많이 있지만 예의가 아니었다. 은사님을 모시기 2주 전쯤에 한 부장과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를 무심코 듣던 한 부장이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했다. 외국인이나 중요한 손님을 위해 회사에서 장기 계약한 호텔이 있는데, 시간만 잘 맞으면 그 호텔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한 부장이 예약해 준 방은 호텔 맨 위층에 있었다. 눈앞에 해운대 바다가 통째로 펼쳐져 있었다. 사모님이 감탄하시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은사님도 환한 미소를 띠며 창가에서 먼바다를 바라보셨다.
“너무 비싼데 아니야?”
“아닙니다. 공짜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 간의 한 부장과의 인연을 얘기했더니 은사님이 한마디 하셨다.
“소중한 인연의 보답을 내가 받는군.”
은사님이 고맙다고 하셨다.
은사님은 내가 고맙고, 나는 한 부장이 고맙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진다.
나도 그렇게 신세를 지고 살았다. 한 부장은 내게 신세를 진적이 없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신세를 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 부장처럼!
나의 제자들도, 나의 아이들도,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이 당장 신세를 값 지 못해도, 먼 훗날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따뜻한 도움을 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