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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손 Nov 28. 2022

오래된 것의 향기

엄마의 화장대 리폼


군대를 제대할 무렵 나고 자란 집이 허물리고 그 위에 신식집이 올라섰.

기름보일러가 돌아가는 새집에는 이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수고도 없어지고 가마솥에 세숫물을 데울 필요도 없어졌다. 이중으로 된 샷시 창문은 창호지를 바른 나무 창문에 비할 수도 없이 산골짝의 황소바람을 잘 막아 주었다. 신식집에 맞춰 새로운 세간이 들어왔고 마치 새마을운동이나 하는 것처럼 신식집은 오래된 대부분의 것을 뱉어내고 새로운 것을 빨아들였다. 오래된 것은 버려지고 일부는 창고에 살아남았다.


버리기 애매한 물건이 창고에 들어가면 사실 다시 햇볕을 보기가 힘들어진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셨다는 화장대가 그랬다. 새집에 설 자리를 잃자 별채의 사랑방으로 옮겨졌지만 두 분만 사는 집에 결국 사랑방은 창고와 다르지 않았다.


밝은 빨간색 바탕에 자개로 봉황, 꽃, 나비를 새긴 아주 화려한 디자인으로, 양쪽에 미닫이 문이 있고 가운데는 큼직한 세 개의 서랍이 있는 서랍장 겸 화장대였다. 그 위에 놓인 거울 역시 빨강 바탕색의 둥근 프레임에 자개무늬가 박혀 있는 거울인데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디자인이었을 것 같다.


둥근 거울에는 구들방의 연기 자국인지 가느다란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은 얼룩이 묻어있는데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주름살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과 함께 늙은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거울에 비친 모든 것은 옛 것으로 보였고, 낡은 앨범에서 본 어린 어머니의 모습, 그 앞날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가늠도 못할 어린 나이의 어머니가 '들러리의 부축을 받아 시집 사립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거울에 어른거렸다.


지금은 창고에서 세월을 그대로 맞아 퇴색한 화장대지만 유난히 반짝거리는 화려한 모습으로 안방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던 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 앞에 앉아서 하루 종일 흙과 태양에 시달려도 아직은 고운 매무새를 다듬던 젊은 어머니 또한 그만큼 빛이 났을 것이다.


사람의 지나간 한 때는 돌이킬 수 없고 기억에만 머물지만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의 한 때는 다시 돌이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혔다.

화장대의 그 한 때를 다시 현재로 끌어오는 것이 숙제 같은 것이었는데 시골집에 갈 때마다 창고방을 들여다보며 거미줄이나 걷고 애꿎은 서랍을 빼고 닫고, 미닫이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대로 고치고 닦아서 쓰기에는 너무 크고 전체가 밝은 빨간색인 가구가 방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미 다른 화장대나 서랍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 양쪽 미닫이 문의 무늬 일부를 잘라내서 사방탁자의 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두 조각의 과거가 현재에 어울릴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화장대 미닫이 문짝은 각재 프레임에 앞뒤로 합판을 붙여 한 통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어서 속은 텅 비게 하여 가볍게 만든 구조였다. 새로 만들 사방탁자의 문에 맞는 크기로 자개무늬 판에 연필 선을 긋고 톱을 댔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톱질하기 전에 숨을 고르는 것은 보통 반듯하게 자르려는 준비인데 이번에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 긴 세월을 버텨낸 오래된 것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었다.


오래된 것에는 특유의 향기가 있다.


몇 번의 톱질 후에 족히 50년 이상 문짝 안에 갇혀있던 과거의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콧속으로 훅 밀고 들어왔다. 오래된 책 냄새에 약간의 박하향이 섞인 것 같은 강한 냄새의 입자가 만져질 듯 굵다.

잘라낸 합판을 들어내니 옛 목수의 작업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자도 대지 않고 거침없이 그은 연필선에는 옛 목수의 자신감이, 치수를 나란히 적고 계산한 흔적에는 꼼꼼함이 느껴졌다. 장비가 디지털화되고 아무리 정교해져도 5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둔 두 목수가 손으로 하는 일이 같다는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믿음직한 동료의 작업을 이어서 하는 느낌이랄까.


첫 톱을 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톱을 대고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자개 무늬는 그리 정교하지 않고 칠이 갈라진 곳이 꽤 많았는데 자연스러운 주름살 정도로 여기고 별도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그냥 쓰기로 했다. 사방탁자의 프레임인 밝은 오크색과 밝은 빨간색의 대비가 커서 빨간 문짝을 진한 월넛 나무로 얇게 둘려 정돈되어 보이도록 했다.

이렇게 조각의 과거가 다시 현재에서 게 되었다.

거실에 자리를 잡으니 세련된 중년 여성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꼿꼿하게 앉아 있는 모습 같다. 너무 젊어 보이지 않아 마음에 든다.

사방탁자의 사이즈도 적당하고 거실 안의 가구들과도 잘 어울린다.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빨간 자개문이 눈길을 사로잡아 처음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어..빨간...'하고 말할 정도여서, 무엇보다도 따듯한 봄날에 꿀벌통에서 꿀벌이 나오듯 무수한 '이야기'가 있는 가구여서 좋다.


하나 아쉬운 것은 사방탁자에 정갈한 도자기 한 두 개만 올려 전통가구다운 여백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얼치기 디자이너의 감각일 뿐인 것이고, 가장 좋은 자리는 '당연히, 반드시' 손자, 손녀들의 사진이 있어야만 하기에,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기에 하시는 대로 그냥 두었다. 대학 졸업 학사모 사진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정작 가구를 보신 어머니의 첫 코멘트는 '이쁘네' 한 마디뿐이었지만 짧은 세 글자 사이사이에 미처 표현하지 못하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이미 오랜 세월 석화된 감정의 무수한 조각들이 잔뜩 웅크리고만 있을 것만 같다.


한낱 가구 리폼에 지나지 않은 것에 무슨 감상이 그리 풍년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때가 되어서 매 가을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온갖 감상이 뒹구는데 하물며 나는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하는 내내 중년이 된 나보다도 어린 어머니를 마주하는 것은 어색하고 조금은 불편하고 애잔했다. 이런 감상은 전에도 없었고 목공을 하면서 다시는 없을 것 같다.


기억하자. 우리 어머니에게도 빛나는 한 때가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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