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동찬 Sep 06. 2022

물이 두려운 프리다이버

프리다이빙, 그 시작


물 밖에 사는 포유동물이라면, 나는 모두가 익사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산소를 마실 수 없는 곳에서 숨이 막히는 공포. 입을 활짝 벌렸을 때, 코와 입 안으로 뿌글뿌글 들어오는 거친 물살, 그리고 따가워지는 콧속.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는 공포.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본 적이 있고, 경험해보지 않았더라도 두려우리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물에 대한 공포가 심했다. 어릴 적,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초등학교 3~4학년 때 즈음이라는 것만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모시고 막내 고모네 가족들과 함께 그 당시 송도 바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흔히 똥물이라고 불리는 그곳에 몸을 담그기 위해 피서를 갔다.


사촌동생과 튜브를 끼고 그 똥물 속에서 열심히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는데, 조금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핑크색 바탕에 스누피가 잔뜩 그려진 내 튜브와 사촌동생의 푸른색 꽃무늬 튜브를 줄로 연결하고 어른들이 잠깐 한눈을 판 새 조금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갔다. 서해는 뻘 때문에 어차피 수심이 낮아 좀 더 깊은 물로 들어가도 어린아이가 까치발을 들면 발이 쉽게 닿았기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매해 해수욕을 즐기러 바다에 놀러 갈 정도로 바다를 좋아했고, 그렇기에 바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과신하는 어린이였다.


우리 둘은 뻘 진흙이 잔뜩 섞여 갈색으로 보이는 똥물에서 첨벙 대며 즐겁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썰물이라는 건, 우리도 어른들도 알지 못했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속도는 어마 무시했다. 한참을 놀다 뒤를 돌아봤을 때 어라?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얼굴 이목구비도 보이던 엄마 아빠가 저 멀리 엄지손톱만 한 작은 점이 되어 있었다.




“나갈까?”




나는 사촌동생에게 태연한 척 말했다. 사촌동생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튜브에 몸을 끼운 채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열심히 팔과 발을 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팔다리를 힘껏 내저어도 엄마 아빠와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멀어지기만 했다. 어느새 엄지손톱 만하던 엄마 아빠가 새끼손톱 만해졌다. 헐떡대며 주위를 둘러보니 해변가는 희미한 포물선이 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망망대해. 우리는 똥물에 정처 없이 휩쓸려가고 있었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촌동생은 이미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모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팔다리에 쥐가 나도록 사지를 휘저어댔다.




‘얼른 나가야 해.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실직적인 공포를 맛보았다. 그것도 자연에 의한 죽음이라니. 움집에 살며 매머드를 사냥해 잡아먹던 원시인들이 이런 공포를 느꼈을까? 나는 이날 이후로 압도적인 자연을 보면 몸이 굳어버리는 공포심을 품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미친 듯이 떨어지는 벼락이나, 3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숲이나, 너무 푸르러서 검게 보이는 심해 같은 것에.


하지만 허벅지에 경련이 나고 팔이 저려 와도 바다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나도 결국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우리는 울면서 목이 터져라 엄마 아빠를 외쳤다. 우리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겠지만, 그제야 해변가에서도 우리의 상황을 눈치챈 어른들이 난리가 난 모습이 작게나마 보였다.


그때, 해양구조대가 출동을 했던가? 아니면 똥물이 흐르는 송도 바다에서는 해양구조대조차 없었던가. 어쨌든 우리는 살아서 그 바다에서 나왔다. 우리를 구해준 영웅은 해병대 출신의 어느 아저씨였다.


손바닥만 한 스피도, 그러니까 겨우 거시기만 가리는 삼각 수영복을 입은 아저씨는 우리가 썰물에 휩쓸려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바다로 멋지게 뛰어들었다. 그 아저씨의 얼굴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아저씨가 입고 있던 수영복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고추장처럼 새빨갰던 수영복.


멋진 평영으로 아저씨는 우리 곁에 순식간에 도착했고, 햇볕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튼튼한 팔을 우리 튜브에 꽂아 넣고는 어푸어푸 열심히 수영을 해서 우리를 무사히 해변가에 데려다주었다.


어른들이 우리 등짝을 내려치며 큰일 날 뻔했다고 소리치던 게 기억난다. 할머니는 눈물까지 보이셨던 것 같다.


구해진 뒤의 기억은 희미하다. 너무 안심한 탓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어른들을 뒤로한 채, 아저씨는 처음 물에 뛰어들 때보다 더 멋있는 뒷모습으로 사라졌다. 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아저씨 성함이라도 물어봤을 텐데…….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제게 연락을 해주세요, 아저씨.


아무튼 나는 그날 이후 바다가 싫어졌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싫어졌다. 여전히 바다를 사랑하는 동생에 성화에 못 이겨 해수욕을 간 여름이면, 나는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이나 쌓으며 놀았다. 바다에는 손발에 묻은 모래를 닦을 때나 들어갔다. 어쩌다 물놀이를 해도 해변가에서 세 발자국 이상 떨어지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나를 엄마 아빠는 괜찮다며 다독였지만, 괜찮긴 뭐가 괜찮아! 물에 빠지는, 그것도 대자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공포는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런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인천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지만 서해 바다를 아주 경멸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5학년.


제일 친했던 친구와 함께 수영장에 수영을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이름하야 어린이 수영 교실. 수영장이라면 썰물도 없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이 키 높이에 맞춰진 어린이 풀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또래보다 키가 조금 더 작았던 나는 발이 닿지 않는 수영장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수영은커녕 물에 머리만 담가도 빠져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젊은 남자 강사는(이 강사도 나를 구해준 영웅 아저씨처럼 스피도를 입고 있었다. 화려한 패턴의 스피도) 수영 교실에 온 아이들을 쪼르르 줄을 세워 앉혀놓고 한 명씩 수영 연습을 시켰다. 나는 그 줄에 껴서 앉아 있다가 내 차례가 다가올라치면 용변이 급하다며 화장실로 후다닥 도망을 쳤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바깥 동태를 살피며 대충 내 차례가 지나간 듯 보이면 태연하게 나와 다시 맨 끝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을 보냈다. 엄마는 내가 수영에 수 자도 배우지 못한 채 수영장에 돈을 그냥 갖다 퍼준 걸 끝까지 몰랐다.


친구는 수영을 훌륭하게 배웠지만, 나는 여전히 맥주병이었다. 수영 교실이 공포의 시간이기만 했느냐? 또 그건 아니었다. 수영 교실에 나갈 때, 좋은 시간이 딱 10분 있었다. 수영 교습이 끝난 뒤 주는 자유 시간.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수경을 스노클처럼 이용해 수영장 바닥을 구경하며 친구들과 놀았다. 그래도 잠수는 할 수 있었다. 숨을 흡! 하고 폐가 터질 것처럼 들이쉬고 바닥에 가라앉으면 친구들이 물장구를 치며 수면을 멋지게 수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쳐다보는 게 기분 좋았다.


발이 닿지 않는 데다 숨을 조금밖에 마실 수 없는 수영은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지만, 내 컨트롤로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바닥에 앉아 있는 건 그나마 마음이 편안했다. 그렇게 나는 한 달간의 수영 교실이 끝나고 잠수의 달인이 된 채 그해 여름방학을 마쳤다.


10대가 되고 나서부터는 학업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와 아빠의 사업이 망했다는 이유로 예전처럼 휴가를 즐기지 못했다. 바다와는 자연스럽게, 너무 다행히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렇게 평생 물이 싫은 채로 사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20대 후반, 고등학교 친구가 스킨스쿠버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킨스쿠버? 그 산소통 메고 들어가는 거?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면 숨 막혀서 죽을 일은 없겠네?”




친구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는 수시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와 화려한 색의 해양 생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나는 그 사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사담이지만, 나는 동물을 너무 좋아한다. 정말 과할 정도로 ‘너무’ 좋아한다. 여전히 물은 무서웠지만, 언젠가 이국의 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하며 손으로 떠낼 정도로 많다는 열대어들을 구경하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스킨스쿠버를 즐기며 그 생활을 하고 있다니. 부러워서 열병이 날 지경이었다.


친구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스킨스쿠버…… 그거 하려면 수영 잘해야 해?”


“수영 잘하면 좋지. 깊은 바다 들어가니까.”




친구의 대답은 깔끔했다. 나는 그 순간 스킨스쿠버에 대한 꿈을 살짝 접었다.




‘물이 무서운데 어떻게 스킨스쿠버를 해. 아무리 산소통 메고 들어가도…….’




하지만 내 몸은 내 정신과 합의가 되지 않았는지, 유튜브에서 연신 동남아 바다를 검색하고 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 순간 그런 의지가 생겼던 것도 같다.


그렇게 여전히 물이 무서운 채로 맞이한 서른둘.


코로나가 터져 기승을 부리기 직전의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모여 점심을 먹으며 떠드는데, 아니 글쎄, 스킨스쿠버를 열심히 해오던 친구가 갑자기 프리다이빙을 배우고 있다고 선언하지 뭔가?




“프리다이빙?”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는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 여름, 너무 더웠던 기온 때문에 머리가 살짝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 내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하고 싶어. 나도 같이 배울래.”




응? 내가 왜 이런 말을?


그 말을 뱉고서 심장이 갑자기 터질 듯이 쿵쾅거렸던 게 기억난다. 벌써부터 물속에 들어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가 반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같이 하면 좋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다음부터는 속전속결. 생각하기 전에 일단 저질러 버리자는 생각이 더 컸다.


나는 친구에게 소개받은 강사님과 카카오톡으로 인사를 했고, 이론 강습 날짜를 후다닥 잡아버렸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이 미지였던 프리다이빙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미처 몰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