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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생강 Nov 04. 2022

어깨 펴고 당당하게 걸어! 고양이!

사람이나 고양이나 먹고사는 일은 매사 한 가지




오늘도 길고양이 두 마리가 당당하게 노란 햇살이 비치는 한옥 큰 대문으로 들어왔다.


첫 번째 CCTV 화면에서 얼룩덜룩한 삼색이 무늬에 검은색 물감을 눈에 쏟은듯한 고양이가 대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회색빛과 하얀색 털이 섞여있는 고양이는 대문 안으로 사뿐사뿐 들어와 돌계단을 오르더니 중간 마당의 찜질방 굴뚝 옆을 서성거렸다.

이런 모습들은 내 서재의 CCTV 화면에 그대로 잡힌다.

때마침, 두 번째 카메라에 어떤 남자가 사진기를 들고 셔터를 누르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더니 정원의 사진을 찍고 한옥 담장을 찍고 서둘러 나가는 모습도 화면에 들어왔다.

세 번째 카메라에서는 대문 앞에 앉아있던 허스키가 코를 아래로 향하고 바닥 냄새를 맡으며 맴을 돌더니 뒷발을 쭈그리고 꼬리를 들고 앉아 똥을 힘주어 싸고 있는 모습이 영상에 들어왔다.


일단 두 번째 카메라가 잡은 허스키의 똥을 처리하러 나가야 했다(허스키 놈이 더러운 것을 싫어해서 싼 똥을 빨리 치우지 않으면 짖어대며 빨리 나와서 치울 것을 명령(?) 하기 때문에).

그리고,  번째 카메라가 잡은 뉴페이스 길고양이들이 굴뚝 옆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니까 휴대폰을 챙겨서 정원으로 나갔다.

새로 보이는 길고양이들 중 하나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하얗고 회색의 고양이만 남았다.

녀석은 나를 보고도 피하기는커녕 굴뚝 옆 수키와 그릇 앞에 앉아서 이렇게 말을 한다.


이봐, 인간. 내가 배가  고픈데,  수키와에다 밥을  나눠주면  될까?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 아주 조금이라도 나는 반가워하며 정말 고맙게 먹을 거야.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단다. , 이제 나에게 너의 자비를 조금만 보여주렴

고양이가 가질 품위를 최대한 차린 어조이다. 그렇지만 간절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찜질방의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 들어가 고양이 사료 봉지에서 사료를 한 국자 퍼낸다.

이건, 고양이가 어떤 저항 불가능한 마법을 부리는 건지 나의 뇌를 조종하는 건지 모를 일인데,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좀비처럼 사료를 퍼내게 된다.

찜질방 문을 닫을 때까지 하얀 회색 고양이는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며 기다리고 있다.

도망도 가지 않고 그 녀석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듯 정확히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국자를 수키와 그릇으로 가져가서 사료 알을 시원하게 쏟아붓는다. 하얗고 회색인 그 고양이는 그 사료를 보고 성큼 망설임 없이 다가온다. 경계도 하지 않고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료알을 물고 부지런히 씹어 삼키고 먹길 계속한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리 급하게 먹나...


그새 옆에 다가온 고랭이가 그 모습을 보고 나지막이 가르릉거려 경계를 했지만,

그것이 얼마 전의 자신의 모습과 똑같다고 생각했는지 겁을 주어 쫓지 않고 그대로 두고 본다.

나는 가만히 옆에 앉아서 그 배고픈 길고양이가 정신없이 사료를 주워 삼키는 것을 보며

“배가 많이 고팠어? 에이구... 맛있지? 많이 먹어라”하고 안타까워한다.

심하게 배고팠던 고것은 바삭바삭 과자 씹는 소리를 내며 급하게 밥을 먹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경계를 하고 다시 먹는 것에 집중한다. 사료가 얼마나 맛있었으면 ‘야옹 야옹 야옹, 냥냥냥’ 이런 노랫소리까지 내며 사료를 씹어 먹는다.

아마 이런 맛있는 사료를 줘서 고맙다는 인사일 거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사료 씹는 소리를 들으며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짐작한다.


녀석은 사료를 다 먹더니 수키와 그릇에 얼굴을 비벼대더니 대문가에 한참을 앉았다가 밖으로 나갔다.

고양이는 소중하고 좋은 것에 얼굴을 비빈다던데...

먹는 것은 사람에게나 길고양이에게나 모두 귀하고 소중하다.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험한 세상과 다투어 경제생활을 하는 거나 길고양이가 저렇게 먹이를 구하고 기뻐하는 거나 매사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힘들었쪄? 길고양이... 힘들었쪄? 인간... 토닥토닥...

그리고, 이곳 한옥에서 정원의 꽃을 가꾸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구절초도 처마 아래 피면 서리가 내리는 11월이 되어 야생의 꽃들은 시들어도 더 오래 아름답게 머물며 핀다는 것이다.

기댈 곳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누군가의 그늘 아래 있으면 그 꽃은, 그 사람은, 그 길고양이는

오래도록 피어난다.    


나는 계단을 올라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한다.

도대체 이 고양이들은 처음 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사람을 보고도 겁을 내어 피하지 않고 저렇게 당당하게,

“이봐, 자네. 나에게 밥을 좀 주지 않을 텐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저 고양이들은 나의 어떤 분위기를 보았길래, 사람들은 나에게 쉽게 걸어오지 않는 말을 저리도 쉽게 하며 다가오는 것일까? 염치가 없는 것일까? 거리에서 오래 살아 닳을 때로 닳아서 저렇게 서슴없이 달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마지막으로 뻗어보는 실 같은 희망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에게 또 자녀들에게 내가 기대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날린다.

“엄마! 나, 또 새로운 고양이가 찾아와서 밥 달라고 했다. 나 이제 마당 고양이만 다섯이 될 것 같애”

“얘들아, 엄마 또 고양이 생겼다. 방금 사진 봤지? 그 고양이들이 또 대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왔어. 그리고 나를 피하지도 않아. 어떻게 생각해?”

“봐봐, 나 또 고양이 생겼다. 새로운 고양이가 들어와서 나한테 밥 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더라. 사람을 보고 도망갈 기색도 없고 너무 이상하고 신기하지?”
대답은 한결같다.

“너가 그 애들 챙겨야 될랑갑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어째 너를 보면 도망도 안 가고 그럴까? 보통 사람들이 가면 고양이들은 도망가는데... 니가 덕이 있나 보다”

“오! 대박! 엄마! 고양이 또 왔어? 애기들 사진 더 없어?”

“ㅎㅎㅎㅎ 고양이 사료 좀 더 줘. 좋은가 보다. 인심이 좋다고 소문났나 보네”

식구들은 이런 반응이다.


경험상 이제 저런 고양이들은 내일도 모레도 우리 집에 계속 들랑날랑하다가 이내 이곳 마당을 집으로 정하고 우리 집의 마당 고양이 커뮤니티에 합류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는 내가 외출을 하거나 외출에서 들어왔을 때 배웅을 해주고 반갑게 맞이해주고 하면서 개냥이 행세를 하게 될 것도 뻔하다. 내가 마당에 잡초를 뽑으면 다가와서 뭐하냐고 참견을 할 것이고 아침. 저녁 식사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툇마루 앞에 단체로 앞발에 꼬리를 두르고 앉아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그런 고양이들이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누가 생명을 저렇게 키우다가 공원에 버리고 가서 이런 떠돌이 불쌍이들이 자꾸 생겨나는가... 휴...



나는 큰 봉투에 5kg씩 든 사료를 두 봉지씩 주문을 한다. 한 봉지가 뜯기 무섭게 사료는 줄어든다. 게다가 이제 이런 뉴페이스까지 우리 집 마당에 등장해 주시니 사료는 금세 바닥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 오는 길고양이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배곯은 채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료를 계속해서 장만할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또 돈을 벌 테고 벌지 않으면 나의 용돈에서 충당될 것이다.

내가 나가서 커피 두 잔 사 먹지 않으면 고양이들이 한 달은 굶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말을 이렇게 해서이지 고양이들의 사료값이 우리 가정의 엥겔지수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상태는 아닌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길고양이를 보다 보면 길고양이들도 모두 자연에서 창조주가 같은 원리로 만든 피조물이라 우리 인간과 같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아프면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

길고양이가 구내염을 달고 왔을 때, 처음에 나는 그냥 사료만 주는 입장이라서 그것들이 어떤 생활고에 놓여있는지 잘 알질 못했다. 아니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면 사료를 주고 그저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하는 전부였다.

그러다가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고양이는 사람처럼 말을 못 하니까 고통이 있어도 그것을 사람처럼 말로 뱉어서 아픔을 호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지금 여기 입이 너무 아파! 나, 이빨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밤새 치통으로 너무 아파서 도무지 잠에 들 수 없었어’

사람은 분명 이만큼 간밤에 아팠었다고 고통을 호소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부터 치과로 병원으로 찾아가서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말 못 하는 고양이는 밤새 혼자서 참고 또 참았을 테고, 아침해가 뜬 그다음, 그다음 날도 계속 아픈데 그래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으니, 죽으면 놓일 고통을 이기고 뱃속의 허기를 달래려면 잇몸에 피가 나서 아파도 먹어야 하는 거다.


나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 오늘도 이처럼 아름다운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여 주세요...... 되게 해 주세요’ 기도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내용의 고하는 것과 함께 기복의 성격이 있는 기도도 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신 거야? 나를 밤이고 낮이고 졸지도 않고 지켜보시는 것이 맞아? 하나님은 내 기도 듣기만 하고 내가 뭐하는지 눈동자처럼 보기만 하고 실제 액션은 안 하시네’ 나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길고양이를 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길고양이들에게 하나님이 혹은 신, 조물주가 나한테 하는 그것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냥 그것들에게 허기만 가시도록 사료만 주고 그들이 입이 아프건 피부병이 있건 크게 관심이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담벼락 위에 앉아서 입이 아파서 소리를 지르는 고양이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뿐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하고 있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보고도 듣고도 알지 못해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네. 나는.



나는 서둘러 나의 하얀색 붕붕이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동물병원에 가서 고양이의 구내염과 피부병에 해당하는 약들을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내가 저들을 저렇게 보고만 있었으니 하나님도 내 기도를 그냥 듣기만 하고 액션 없이 봤겠지.

그러나, 이것은 나의 작은 깨달음이었지 하나님이 내가 하는 기도에 응답하기를 바라는 대가성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길고양이의 삶을 보고 내 삶에 빗대어 중요한 교훈이나 인사이트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도 길고양이가 한옥 나무 대문으로 당당히 들어와서 찜질방 굴뚝 옆에 앉았다가 나가는 모습이  1번과 3번 CCTV 카메라에 잡혔다.

아마, 그 길고양이는 대문을 나가며 생각하겠지.


 ‘이제 나도 밥 먹을 곳이 생겼어. 살아가는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구나’


CCTV 화면을 보면서 나는 말한다.

“어깨 펴고 당당하게 걸어!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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