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주의자의 신년 다짐
존재의 가벼움을 향하여
만연한 완벽주의 담론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증상일 것이다. 적당히가 없는 경쟁, 잘해야 한다는 강박, 늘상 외부와 비교하는 세태. 거기에 역사문화적 공동체주의까지 더해진 한국은 특히, 사회적 압박과 완벽주의로부터의 자유라는 미션이 거의 전적으로 개인에게 떠맡겨져 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근본적이면서도 공허한 면이 있다. 의미부여와 완벽주의가 성격의 한 측면을 구성하는 나는 그것이 태생의 기질인지 순응적인 한국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숙명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진다. 예민함은 세심함을, 완벽주의는 꼼꼼함과 치밀함을 품는다. 품을 수 있다, 건강하다면. 그렇게 보면 나는 건강한 편은 아니다. 『오늘도 시작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라는 책에서 저자는 완벽주의자를 네 가지 유형 -회피형, 감독형, 자책형, 안정형- 으로 나누는데, 이 분류에 따르면 난 전형적인 회피형 완벽주의자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며 시작이나 선택을 망설이는, 소위 게으른 완벽주의자. 책을 읽고 글을 가볍게 남기지 못하는 것도,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르는 데 한참이 걸리는 것도(결국 그러다 지쳐 닫는다) 그러하고 1월 들어 이렇게 작년 결산을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한 해의 정리는 1231이 지나기 전 마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아야 시작을 잘했다는 개운함, 자연스러운 생각이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의 과한 의미부여가 발목을 잡는 것이다. 100%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아쉬움에 김이 빠지고, 이번에는 가볍게!의 일환으로 해를 넘기고서 작년을 돌아보지만 원래라면 안 쓰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년간 실존주의 화두를 유지한 것 또한 인생에 원래 의미 같은 건 없음을 느끼고도 공허감이나 집착을 버리지 못한 데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근거에 기반한 확신이 생겼다. 의미 같은 건 없지, 아무렴.
그래서 가볍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친구들을 보면 어떻게 그러지 싶다. 작년 12.31 독서모임에서도 사업하는 친구에게 불확실성에 대해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즐기려고 한다, 관리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는 맥락이기에 대단하다 했는데 이런 모습들이 정말 부럽다. 매사에 의미 부여를 너무 많이 하면 존재와 의식이 비대해져 삶이 피곤해지는데, 그게 나름 세상을 면밀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이라 좋기도 하지만 이젠 한 번 건강하게 활용해 보고 싶다. 그런 점에서 불확실성 투성이일 교환학생 생활이 완벽주의를 내려놓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마음 한구석에 품는다.
작년 한 해 일기를 훑으며, 의미부여 줄이기와 완벽주의 타파가 똑같은 말로 곳곳에 있는 걸 보고 진절머리가 났다.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반복으로, 목표는 수정·보완을 위해 세우는 마음으로, 존재의 무게를 덜고 잰걸음으로 나아가기. 가벼워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