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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누리 Dec 25. 2022

노는 게 제일 좋아

노동은 과연 신성한가

“돈만 많으면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 그치?”


남자친구와 오랜 여행을 함께 하며 자주 하는 말이다. 여행지에서 문득문득,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뜨거운 행복감에 젖곤 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 인간이 남긴 경이로운 건축물, 외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 따위를 오감으로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행복은 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던가. 새로운 공간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누리다 보면 순수하게 밀도 높은 행복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뭐지? 분명 집 나오면 고생 이랬는데. 모든 것이 낯설었던 여행 초반엔 고개를 끄덕였던 말도 이제는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행자만큼 팔자 좋은 삶이 또 어디 있나 싶다. 한정된 돈으로 여행하는 1년짜리 시한부 여행자는 감히 그 순간이 영원하길 꿈꾼다.  


그리고 난 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순수한 행복의 근원을. 이는 분명 업(業)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만 해도 난 내 일을 사랑한다고 자부했다. 취업이 어렵다, 어렵다 하는 시기에 ‘오늘도 멋지게 일하는 나 자신’에 푹 빠져 있었다. 일은 재밌었고, 보람찼으며,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돈도 그럭저럭 번다는 생각에 삶이 만족스러웠다. 노동하면서 자아실현도 하는, 꽤나 모범적인 직장인이었다. 그래서 감히 “난 일 하는 게 제일 재밌더라” 따위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루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고,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와 마침 도착한 닭발을 뜯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내 인생에서 회사가 사라졌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업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지금,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일을 안 해서다. 아침에 눈 뜨면 ‘오늘 발제는 또 뭘 한담? 마감 후에도 할 일이 산더미네' 하던 생각이 ‘오늘은 이 여행지에 가서 이걸 봐야지. 아 그리고 그 음식은 꼭 먹어봐야 됀댔어'로 바뀌었다.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나를 옥죄던 과업이 사라지니 마음 졸일 일도, 스트레스받을 일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여행으로 얻는 갖가지 감정이 빼곡히 채운다. 여행하다 피곤하면 하루고 이틀이고 푹 쉰다. 점심 먹고 노곤노곤 잠이 쏟아지면 벌러덩 드러누워 낮잠도 잔다. 그러니 넘치도록 행복한 순간이 많을 수밖에. 이제 정말 알겠다. 야근 후 닭발을 먹어서 행복한 게 아니었다는 걸.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진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닭발을 뜯어서 행복했던 거였어!  


여행하면서 늘 느낀다. 인간은 노동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힘들고, 스스로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일을 하며 '나 넘치도록 행복해'라고 말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좋아하고 잘하는 일마저도 생계가 돼 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니 러셀 양반도 지적하지 않았나. '노동이 곧 미덕'이라는 신념이 우리 사회를 좀먹는 거라고. 행복하길 원한다면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라고. 어쩌면 그동안 내가 일하며 성장한다고 느꼈던 '자아실현'이란 개념은 알량한 자기위로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인투식스, 그 이상을 오롯이 회사에 묶여 사는 내 처지가 가여우니까.


굳이 노동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성숙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끝없는 노동이 자아 실현을 방해할 때도 많다. 일 하느라 무언가를 배우고 경험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생소한 음식을 맛보며, 공통점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평소 '나는 절대 못해'라고 생각한 무언가에 과감히 도전해보는 것. 하나하나 전부 삶의 지평을 열어줄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란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다만 과업에서 자유로운 삶일지라도 무언가에 오롯이 집중할 시간은 남겨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게을러지고, 게을러지면 이내 모든 게 귀찮아진다. 삶에 활력이 없어지는 건 지양해야 한다. 종국에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짧은 생에서, 매일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나의 경우 글쓰기가 삶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글이 마음처럼 써지지 않는 순간엔 일 할 때 경험하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스트레스가 몰려오기도 하지만 괜찮다. 힘들면 잠시 멈추고 내일 다시 하면 되니까. 정 안 써지면 포기하고 새로운 글감을 찾으면 되니까.


이 여행이 끝나면 나도 다시 노동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먹고는 살아야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목표는 생겼다. 최대한 빨리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내는 삶이 아닌, 진정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평생 지금처럼 자유롭게 사는 삶을 감히 계획해 본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던 이집트 다합에서의 여유로운 나날. 내가 좋아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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