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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나는 백구 Sep 22. 2024

짧은 글 긴 이야기(29)

비문학 독해 연습 파일 (29)

이 글은 수능 비문학 독서 지문 공부를 위해 연습용으로 만들었습니다. 지문의 내용을 읽고, 가볍게 문제를 풀도록 구성되었습니다.


경쟁과 공정성     


  경쟁의 윤리는 경쟁의 논리를 전제로 한다. 곧 경쟁자의 능력과 비례해서 보상의 양이 결정되어야 하고 이 결정에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윤리적으로 못 박는다. 이와 같은 윤리의 요청은 경쟁자가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다른 윤리의 요청에 바탕으로 둔다. 그러므로 경쟁 윤리는 똑같은 출발선에서 경쟁자가 출발하여 능력에 따라 결승점에 이르게 되고 도달한 차례에 따라 보상의 양이 결정되어야 함을 엄격하게 규정한다. 이같은 경쟁 윤리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조명해 볼 때 적어도 세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 첫째는 똑같은 선 위에 모든 경쟁자가 서 있는지의 문제이고, 둘째는 비록 같은 출발점에서 뛰었다고 하더라도 뛰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결승점에 이를 수 있는지의 문제이고, 셋째는 먼저 결승점에 이른 사람이 가장 귀한 보상을 가장 많이 분배받는지의 문제이다. 


  먼저 출발점의 문제부터 따져 보자. 민주주의 국가는 모든 사람이 출발점에서 서로 동등함을 헌법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사람은 날 때부터 모두 법 앞에서 평등하고, 교육을 평등하게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출발점에서 서로 동등하다고 함은 곧 기회의 균등을 뜻한다. 잘사는 집안의 아이도 못하는 집안의 아이도,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자식도 낮은 자리를 가진 사람의 자식도 모두 출세할 기회를 똑같이 가지고 있다. 경쟁은 교육 경쟁이 가장 기본이 되므로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진다고 헌법이 규정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잘사는 집안의 자식과 못사는 집안의 자식을 서로 견주어 보자. 그들이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곧 같은 교육 기회를 가지고 경쟁한다고 하자. 참으로 그들의 출발점이 같은 것일까? 오늘날에 반딧불 밑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케케묵은 동화의 소재로나 쓰일 수 있는 것이고,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 잘사는 집안의 자식들보다 더 공부를 잘한다는 것도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가족의 뒷바라지가 없이는 공부를 잘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 달에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씩을 과외 수업에 투자할 수 있는 넉넉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고서는 좋은 상급학교에 가기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기회는 똑같이 주어질지 모르나, 그것만을 강조하여 경쟁을 온당한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기회 균등의 사상은 이미 버티고 있는 부당한 불평등을 튼튼히 한 이데올로기적인 작용을 한다. 여기에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 이익을 보존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뚤어진 현실 인식을 뜻한다. 따라서 고전 민주주의의 자유방임사상이 비판을 받는다. 공개 시장이나 공개 경기장에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계속해서 이미 얻은 이권을 보호하고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회 균등의 사상은 소득의 불평등을 더욱 깊게 함으로써 잘사는 사람을 더욱 잘살게 하고 못사는 사람을 더욱 못살게 하는 비극을 낳는다.


  이러한 부당한 불평등을 없애려고 이른바 사회 복지 정책을 마련한다. 이 정책의 하나로 누진세 제도가 나온다. 많이 버는 사람에게는 많은 세금을 물리고 적게 버는 사람에게는 아주 적은 세금을 물린다. 얼핏 보기에는 이와 같은 정책이 출발선의 불평등을 줄일 것 같으나, 실제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이러한 정책을 쓰기 전에 모든 사람을 진실로 똑같은 선에 있도록 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누진세는 중산층이 위의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막는 결과를 만든다. 그러나 이미 부자가 된 사람은 많은 부동산에서 얻는 소득으로 부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상당한 혜택을 받아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중산층 수준에서 머물러야 한다. 중산층에서 위의 계층으로 올라가려면 힘에 겨운 세금 때문에 자꾸 제자리로 떨어진다. 이것이 오늘의 선진 자본주의 공업 국가들의 문제이다. 복지 정책을 써도 불평등을 없애지는 못한다. 특히 출발선의 불평등은 없어지지 않고 사회에 잠재된 불안은 커 가고만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흑인들은 출발선에서 동등하기 바라기보다는 종착점에서 동등하기를 더 바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출발선에서 동등해지려면 꽤 오랜 동안에 걸쳐서 종착점에서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얼핏 보기에는 억지 같다. 가정과 사회 계층의 뒷바라지를 받지 못해서 늦게 도착한 사람도 그 출발선의 구조적인 약점을 인정받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논리에 따르면 흑인과 백인의 품삯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 비록 능력이 없는 흑인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는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품삯에도 차이가 없어야 한다. 여자가 오랫동안 부당하게 차별 대우를 받아 온 결과로 현재와 같은 능력의 차이가 나왔으므로 앞으로 꽤 오랫동안 능력의 차이를 무시하고 남녀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의 바탕이 되는 능력 본위주의를 밑바탕에서부터 부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중세의 형편에 견주면 근대 사회의 기회 균등 사상이나 출발선의 동등 사상은 혁명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종착점에서의 평등사상과 견주면 매우 보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능력에 따라 종착점에 이르는 문제를 살펴보자.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의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고 치자. 그러면 제 능력껏 달린 사람이 종착점에 먼저 이르게 될까? 이러한 문제를 들추는 데에는 심각한 까닭이 있다. 경쟁자들이 달려야 할 길에는 도로의 차선처럼 선이 뚜렷이 그어져 있어서 경쟁자들이 반드시 그 선을 따라 뛰어야 한다. 선을 벗어나서 가로질러 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치 야구에서 1루의 주자가 2루를 거치지 않고 바로 3루로 가는 것 같은 편법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유럽에서나 미국에서 첫 번째의 문제, 곧 출발선의 문제인 기회 균등의 사상이 도전을 받는다고 하면 한국과 같은 곳에서는 둘째 문제와 셋째 문제가 매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곧 달리는 사람들이 제 길을 따라 달리는지 그렇지 않으면 마구 가로질러 가는지 하는 문제와, 비록 모든 사람들이 제 길을 바로 달렸다고 하더라도 종착점에서 분배되는 보상의 양이 공정한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미친 것처럼 제 길들을 벗어나서 달리는 것 같다. 정육점에서는 물 먹인 소고기가 버젓이 팔린다. 불량 식품이 거리에 흔히 보인다. 집은 날림으로 지어진다. 심지어 수출 상품까지 불량품이 만들어진다. 차는 복잡한 거리에서 곡예를 하듯이 하며 빨리 달린다. 차선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기업가들은 당당하게 제 길을 달려 돈을 벌려고 하기보다는 옆길이라도 달려 염치없이 돈을 긁어모으려고 한다. 외화를 나라 밖으로 빼돌리고 탈세를 한다. 학생들과 그 부모들은 학교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귀족적인 과외 수업에 열중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애쓰고 힘을 기울여 목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고, 권총이나 칼을 들고 은행을 털든지 아이를 유괴하든지 사람을 죽이든지 하여 돈을 손에 쥐려고 한다. 제 길을 벗어나는 것을 누워서 떡 먹듯이 하다. 왜 이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지름길로 가야만 종착점에 먼저 이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서 경기하는 것을 보라. 가볍게 웃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고 마구잡이로 하는 것을 보면 슬프게 느껴진다. 그들의 경기는 바로 이 나라의 사회 상태를 비춰 주는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끔 소름이 끼치게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상황에서 잘 달리는 능력이란 제 길을 따라 충실하게 달리는 능력이 아니라, 옆길로 빠져 지름길에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 같다. 누가 법과 질서를 더 잘 깨뜨리는지를 겨루는 경쟁과 같다. 미쳐 날뛰는 경쟁이다. 이것은 사회 철학자 홉스가 말한 대로 막되어 먹은 ‘자연 상태’와 비슷한 처절한 동물 사회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누가 정직하게 뛰려고 할 것이며, 누가 길을 따라 능력껏 뛰려고 할까?

모두가 길을 따라 열심히 능력껏 뛰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다. 종착점에 이른 차례에 따라 보상이 분배되는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정직하게 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견주어 부당하게 적은 양의 보상을 받았다고 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종교와 인종과 성의 차이로 말미암아 먼저 온 사람이 뒤에 온 사람보다 나쁜 대우를 받으면 이러한 사회는 무너질 운명을 안고 있는 사회이다. 이것은 의롭지 못한 불안한 사회이다. 사회 정의가 없어진 캄캄한 사회이다.


1. 경쟁의 윤리는 기회의 균등성, 과정의 공정성, 분배의 공평성을 중심으로 규정된다. (O  X)     

2. 중세와 비교하면 근대 사회의 경쟁 윤리는 매우 발전적이지만, 최근에 언급되는 결과의 평등한 분배 문제에 비하면 보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O  X)     

3. 불법적인 행위로 돈을 버는 것은 출발선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O  X)     






1(O)     2(O)    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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