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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향쌤 May 16. 2023

전하의 꿈을 뵈옵나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지난밤 꿈에 

아버지께서 뒤주에서 나오셔서
봉수당에 차려진 회갑상에 앉으시고는

 "뒤주 속에서
8일을 굶었더니
 
무척이나 배가 고프던 차에

아들이 이렇게 풍성하게
60년을 맞이한 내 생일상을 차려주니 
마음이 따뜻하고 가슴이 벅차

음식을 먹기도 전에
눈물이 차올라 마를 새가 없구나. 

장하다.

내 아들.

온갖 멸시와 감시의 눈초리,
어려움들 속에서도 아주 훌륭히 성장해 주었구나.

나를 대하듯이
만백성을 어루만져주는
성군으로 장성했으니

내 이 회갑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나

마음이 이토록 흡족하고 기쁘기 그지없구나. 

부디 오래도록 장수하여
만백성을 살뜰하게 어루만지고
보살피는 성군으로 오래도록

부디 오래도록 백성들을 살펴다오."


달려가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고 있으니 눈물이 흘러 바다가 되고 날이 밝았다.




정조대왕은 1795년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해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화성으로 원행(임금의 행차)을 나오셔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세가 같으시니 신하들에게는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었다고 했으나, 회갑연이 아버지 생일 하루 전날에 이루어졌고, 나중에 다시 어머니 생신날에 맞추어 서울에서 어머니 회갑연을 열었으니 실은 아버지 회갑연을 열어드린 것으로 보인다.


청룡언월도 장용영 무사님의 이야기 속으로 with 역사탐방 '굴렁쇠'


5월 13일은 참여연대 역사탐방 동아리 '굴렁쇠' 회원분들이 수원화성으로 탐방(명승지나 유적지 따위를 구경하기 위하여 찾아감) 나오신다기에 안내를 맡아 장용영 군인들의 시연과 수원화성을 안내해 드렸다. 수원화성은 5.7km로 하루 동안의 탐방 안에 수원화성의 정수를 전해드리고자 애를 쓴 봄날이었다. 탐방을 와 주신 덕분으로 정조대왕과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정조대왕은 우리 역사상 대왕으로 칭송받는 3분(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정조대왕)중 한 분이시고,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에 수많은 언론에서 이야기해 왔고, 수많은 콘텐츠들이 있기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정조대왕의 애민사상과 실학사상, 수원화성의 독창성과 위대함,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가치가 있다.


5월의 향긋한 햇살 아래 

빚 나는 수원화성의 시작이


눈물과 고통이었다는 것은 

삶과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귀한 시간을 내어 멀리서 수원화성을 찾아와 주시는 분들께 어떤 마음을 전하면 좋을까 고민을 거듭해 갔다.


정조대왕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지금의 나도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을 잘 알기 어려운데, 200여 년 전 대왕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그분의 말씀과 상황을 통해 헤아려볼밖에



10살. 지금 초등학교 3학년 나이


친할머니(영빈 이씨)가 아버지(사도세자)를 죽여달라 청하고,

친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에게 자결하라 명령하고,

주변 신하들이 말려 아버지가 자결을 하지 못하자,

외할아버지(홍봉한)가 뒤주를 가져오고 가두는 형벌을 집행하고,

어머니(혜경궁 홍씨)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자신은 할아버지(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 울면서 애원했지만, 쫓겨난 채

아버지(사도세자)는 한여름 뙤약볕에서 굶주리다 8일 만에 돌아가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신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장례식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상복도 입을 수 없었고,

궁 밖으로 쫓겨나 있었던


10살의 이산.


왕의 손자로 태어난 죄인가?


                     


3개월 뒤


무시무시한 할아버지(영조)가 불러

처음으로 다시 마주한 할아버지와 손자(이산).


할아버지(영조)가 묻는다.


"임금은 부지런해야 하느냐? 게을러야 하느냐?"


한참을 주저하다 대답을 하는 초등 3학년 손자.


"부지런해야 하옵니다."


"내 너를 지켜보겠다."


지켜보겠다. 

지켜보겠다. 

지켜보겠다.




요즘 대한민국의 입시중심 교육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입시공부 스트레스로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가 지켜보겠다는 어렸던 정조대왕은 어떠했을까. 


수시로 궁녀와 내시들이 자신이 공부한 공책을 뒤져보고, 공부방문에 귀를 대고 오고 가는 말을 엿듣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다.


임금으로 즉위한 다음 해에는 잠자는 방 지붕에 자객이 들어와 다행히 잡았는데도 자객의 뒤를 캐지 못한다.


역모죄. 대역죄인으로 죽은 아버지(사도세자)였기에 장례식은 물론이거니와 묘지도 변변하지 못했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고 짓기 시작한 화성행궁 신풍루 앞


1789년. 임금이 된 지 14년 만에 아버지 묘를 좋은 자리로 이장하고, 묘호도 추승한다. 이장한 이래 돌아가신 1800년까지 13번이나 한양에서 수원으로 성묘차 내려오신다. 아버지 회갑이 되는 해인 1795년에는 특별히 8일간 오고 가시는데, 뒤주 속에서 8일간 굶주리셨던 아버지를 위해 8일간의 원행으로 진행한 것이 아닐까 헤아리기도 한다.


 



불취무귀


아버지, 어머니 회갑잔치에 참가한 신하들(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하고, 정조대왕 자신이 임금이 되는 것도 필사적으로 막으려 죽이려고까지 했던 집권세력)에게 모두 술잔을 가득 따르게 한다.


그리고, 

정조대왕은 건배사를 제안한다.


취하지 않는 자는

돌아갈 수 없다.(불취무귀)


어려서부터 

수많은 곤란과 어려움 속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는 없었을까?


올바르고 크게 성장하여 임금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영조)의 기대감에 힘들지는 않았을까?


내가 임금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수많은 신하들과 계속 감시하는 궁녀들과 내시들의 눈초리들에

온몸이 움츠려들지는 않았을까?


공황장애는 없었을까?


아버지는 보고 싶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서양의 모든 성곽의 이점들을 아우른 수원화성에서

부모님 회갑잔치를 성대하게 열고서


아버지를 죽이고

나를 반대한 세력들에게 

거하게 한턱을 쏘는 

강인한 자신감과 

큰 포용력을 발하는 건배사.


불취무귀.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워낙에 타고난 무인(조선왕은 무인 집안, 이성계가 고려 대장군 출신)으로

활은 백발백중이요. 술과 담배를 너무 가까이한 탓인지

47세에 서거하시고 만다.


조선이 사실상 끊어진 안타까운 순간이다.


정조대왕의 철저한 실학사상으로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수원화성의 재원(돌, 벽돌, 목재 등)이

못의 개수와 출처, 비용까지 수원화성에 참여한 인부들 이름과 지불한 비용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복원한 성벽임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을묘년에 8일간의 원행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통해

비용의 마련 경로, 비용이 사용된 출처가 숟가락 개수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조대왕이 얼마나 위대하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살피셨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796년에 완성된 수원화성.

정조대왕은 수원화성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풍부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자신의 돈을 내어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고, 시장상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백성들이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조선은 생활하는 곳의 성은 읍성으로 작게 만들고 전쟁 시에는 산성으로 피신해 방어하도록 했는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단점을 보완하고자 읍성과 산성의 장점을 하나로 아우른 방어가 가능한 읍성으로 수원화성을 만들고, 장용영의 본진인 외용 5천 명을 상시 주둔케 한다. 


정도는 신하들에게 1805년(52세)에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화성에 내려와 지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1800년(47세)에 서거하시고 만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서거라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순조)의 나이 10살. 지금 초등학교 3학년. 어린 아들 걱정에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


건강관리를 좀 더 잘해주셨더라면,

술과 담배를 좀 더 일찍 줄이거나 끊으셨더라면,

10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이겨내시는데 술과 담배가 어쩔 수 없는 바가 있겠지만,

문무를 겸비한 백성을 사랑하신 대왕의 이른 죽음이 못내 아쉽다.


정조대와 서거 후 105년 조선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수원화성에서 

정조대왕의 꿈과 만나보는 귀한 시간들이길...


전하,
전하의 꿈을 뵈옵나이다.

전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 스스로 풍성하고 행복한 자신의 삶을 살아 전하의 뜻을 이루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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