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의 도전, 그리고 대가
오늘 집 근처 공원에 작은 행사가 있어 와이프를 차로 데려다주고 왔다.
와이프가 약 9개월간 꾸준히 출석하며 배워왔던 캘리그라피 수업 강사님의 제안으로, 강사님을 포함한 제자들이 오늘 이 행사에서 글쓰기 재능기부를 한다고 했다. 1년 남짓의 짧은 수련 기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노력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하더니 결국 참가자로 선발이 되었다. 비가 오는 싸늘한 오후 날씨도 그녀의 열정을 이길 수 없었나 보다. 전투 장비를 챙긴 와이프는 보무도 당당하게 모임 장소로 걸어갔다. 행사 시간 동안 함께 있어줄까 물어봤지만 와이프는 자기를 내려주고 그냥 가라고 한다. 그 당차고 든든한 뒷모습에 파이팅을 외쳐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점심도 먹고 하여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오랜만에 맞이한 휴식을 즐길 겸 하여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깨작거리면서 보았다. 잠시 후 정신이 몽롱해지며 태산보다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몇 번 저항을 해 봤지만 자연재해급 무게는 감당 불가라, 한 번 더 꿈틀 하던 나의 눈은 스르르 감긴다.
"삐삐삐삐, 띠리리~"
"아빠, 나 왔어!"
응? 뭐지? 와이프가 오후 3시 반에 출사표를 던진 지 언제인데,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와?
시간을 보았다. 6시? 아! 내가 침대에 있는 이유가 명확해졌구나. 내 꿀 같은 휴일 오후 시간을 잠으로 날려버리다니.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비도 오고 날씨도 추웠는데 왜 자기를 보러 오지 않았냐며 툴툴거리면서도 신나는 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상기된 와이프를 본다. 따스한 물 한 잔을 쭈욱 들이켜더니 이내 썰을 풀기 시작한다.
행사장에는 예상과 달리 강사 선생님과, 남자 제자 한 명, 그리고 자신을 포함 총 3명이 캘리그라피 글쓰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찾았고, 그중 적지 않은 인파들이 캘리그라피 행사장에 다녀갔다고 한다.
그중 유독 사람들의 인기를 많이 차지했던 글귀들은 집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인생의 시금석과 같은 글들이다. 캘리그라피는 그 글씨 자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좋은 문구들을 차용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듯하다. 행사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비바람은 걷히지 않았고, 바람은 더욱 사나웠다 한다. 게다가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는 바람에 추위가 옷을 뚫고 안으로 들어와 손이 서서히 마비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와이프는 멈출 수가 없었단다. 아니 멈출 여유를 갖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사람들이 와이프의 글을 보고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하더니 강사님을 포함한 경력 2년 이상의 클래스 선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이프 앞에 줄을 섰다고 한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등에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였단다. 긴장감으로 인해 문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실수에 대한 불안감으로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고 한다. 그러나 와이프는 들이댐의 여왕! 일단 써 내려갔다. 사람들의 이목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서서히 뜨거웠고,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고 한다. 자신이 써 준 글씨를 흡족해하며 돌아서는 사람들, 잘 써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 아이들. 행사가 끝나고 해가 넘어갈 무렵, 와이프는 알 수 없는 희열감과 보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진행된 그녀의 영웅담을 다 듣고 났을 때, 나는 문득 와이프의 모습에서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을 받았다. 강사님의 지도 아래 강의실에서만 써 내려가던 과정에서 벗어나, 오늘 반강제로 세상에 던져졌던 아내. 그리고 가산점 없는 환경, 호의감 전혀 없는 사람들 앞에서 본인의 글씨를 냉정하게 평가받아야만 했던 야전. 이 모든 환경과 부담감을 와이프는 멋지게 극복해 내었다. 오늘 와이프는 도전과 성공을 제대로 등가교환한 삶을 살았다.
똑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이 상황에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게 마련이다.
환경과 심리, 동기, 보상에 대한 계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사실 오늘 와이프의 캘리그라피 행사장에는 총 5명의 멤버들이 재능기부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참여하지 않았다. 비가 오고 차가운 날씨, 부족한 자리 등 여러 가지 외부요인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력이 일천했던 와이프가 한자리 꿰찼고, 결국 본인의 소임을 멋지게 수행하였다. 그 결과로 와이프는 돈을 주고도 얻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하였고 내공과 스킬, 자신감의 레벨이 한 등급씩 상승하게 된 것이다.
좋은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이다. 온실과 같은 환경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고 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는 있으나 사람을 성장시키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온실에서 재배한 시금치보다 바다 끝에서 해풍을 맞고 영근 해남 시금치가 맛이 좋다. 따라서 시중에서도 비싼 가격으로 거래가 된다. 금산이나 강화 지역의 밭에서 농약으로 재배된 인삼과, 산속 깊은 곳에서 오랜 기간 동안 척박한 환경과 매서운 자연을 견뎌내고 성장한 산삼의 가치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비바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을 의도적으로 실전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현장은 이론과 다른 변수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로 인해 정답이 정답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결괏값이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한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것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가치지향적인 답을 내어 놓기 때문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알리바바의 마윈, 최윤호 삼성SDI 대, LG전자 조성진 부회장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리더들은 결국 편안한 사무실 대신 직접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답을 찾아냈고 이를 성공으로 실현해 냈다. 이들의 사례는 어쩌면 우리와 같은 소시민들에게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저 리더들 중 일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보다 학력이 낮은 이들도 있다. 그래도 먼치킨으로 보이는가?
나보다 조금 더 앞선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를 서슴지 않지만, 넘사벽 정도의 능력자들에게는 비교의식조차 가지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이제는 마인드를 리셋해야 할 때이다. 나보다 조금 더 앞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개방적이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강연이나 간담회를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기회가 된다면 성공 노하우를 듣고 질문도 할 수 있는 부류이다. 하지만 우리가 먼치킨 기업가들을 만날 확률은 매우 낮다.
우리의 스승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멀리 찾지 말고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선배나 온라인 이웃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약간 앞서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먼저 손을 내밀거나 적극적으로 이웃 맺고 친한 척해보자. 기회가 된다면 그 사람과 식사도 하면서 친분을 쌓자.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성공의 비결을 알려 줄 때가 올 것이다. 밥 한 끼로 성공 패스를 얻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횡재인가? 기회 앞에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길 바란다.
자존심은 노노, 벤치마킹은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