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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 한바구니 Jan 11. 2024

누군가를 향한 신뢰가 주는 힘

믿음이라는 단어의 힘

입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다. 

7월 한 여름, 찜통 같은 더위가 대지를 지배하던 날, 우리는 북한군의 전쟁 개시에 대비해 모의 전쟁 훈련을 실시하였다. 우리 부대는 중화기 장비인 81밀리 박격포 부대였기에, 훈련이 개시되면 군장 위에 박격포 장비를 얹고 소총부대의 후방 지원을 위해 우리의 고유 작전지역인 589 고지를 올라야 했다. 


당시 신병이었던 나는 바짝 마른 체구에 힘도, 깡도 없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20킬로그램짜리 쌀 한 포대의 무게를 얹고 선임병들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화생방 훈련을 겸하였기에 얼굴에는 방독면을 착용하였다. 더위 날씨에 방독면, 그리고 등에는 20킬로그램짜리 군 장비. 상황이 이보다 더 가혹할 수는 없었다. 언덕을 오른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서서히 정신줄을 놓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정신은 있었는데 몸은 움직이지를 않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였고, 숨은 쉴 수 없었다. 눈물과 콧물, 침이 범벅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영락없는 좀비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정신과 몸이 따로 노는 상황. 


"빨리 올라가 이 XX야! 뒈지고 싶어?"

"퍽, 퍽!"


순간 둔탁한 무언가가 내 등을 가격하기 시작하였다.  뒤에서 나를 책임지던 선임병이 겨냥대라고 하는 긴 쇠막대기로 나를 때리며 '정신 차리라'라고 일갈하고 있었다. 그래도 후임병이 앞이 아닌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선임병은 놀라서 내 머리와 어깨, 팔 등을 사정없이 쥐어 패기 시작했다.


"야, 이 XX야, 정신 안 차릴래? 야!"

"퍽, 퍽!"


신기했다. 분명 쇠몽둥이로 몸이 맞고 있었는데,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에서 누군가 돼지를 잡는 장면을 소리로 듣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가야 해. 00야, 가야 해.'


나 자신에게 말했다. 서서히, 그러나 겨우겨우 내 발걸음은 산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완곡한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리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내 눈앞에 펼쳐진 산악 길목. 한쪽은 가파른 낭떠러지, 다른 한쪽은 지뢰밭.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편히 죽을 수 있을까? 지뢰는 사지를 찢기 때문에 아플 것이다. 낭떠러지가 편하겠지. 이제 그만 삶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내 몸은 천천히 낭떠러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우리 00 이는 착하니까, 군대 가서도 잘 할겨. 엄만 믿어."


짧은 찰나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뇌를 휘젓고 들어왔다. 동시에 군에 입대하기 직전 어머니랑 집에서 손을 잡고 찍은 사진과, 어머니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잠시 걸음을 주춤거리고 있을 찰나, 뒤쪽에서 나를 강하게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선임병이 순식간에 군장과 나를 당겨서 안전한 곳으로 밀어버렸다. 나는 뒤로 나자빠진 채 가뿐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천천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니 방금 죽을라 했제? 마, 쫌만 견디라. 곧 끝난다."

"김 이병, 쫌만 참아라. 저 꼭대기까지 가면, 아이스크림 준다."


선임병들이 한 마디씩 거들며 용기를 주기 시작했다.

소대장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나에게 다가와서 옆에 앉았다.


"김 이병, 나도 부임 첫해 뛴 훈련에서 너처럼 낙오했다. 똑같이 죽고 싶었는데, 여기 전우들 덕에 목숨 건졌다. 너도 할 수 있다. 같이 가자."


소대장의 말이 끝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서서히 올라옴을 느꼈다.

믿어줌의 힘, 격려의 힘을 함께 체험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나는 이 전처럼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힘들 때마다 보여준 동료들의 신뢰는 나를 극한 상황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몇 차례의 개인화기 사격과 포사격 훈련에서 우수직원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고, 무사히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 후 어머니를 뵐 때면 나는 항상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나를 믿어준 손. 나를 살려 준 손.  이 손에서 시작된 믿음의 힘이 현재까지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든 무한 에너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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