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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Nov 01. 2023

문득 그리울 수도 있는 것이다

눈이 많던 어느 겨울 향기로운 추억.



내가 사는 지역은 가을에 비가 자주 내린다. 지난 며칠 동안 강한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자주 쏟아졌고 오늘도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습기 머금은 찬 바람맞으며 잔뜩 흐린 하늘을 보고 있자니 묻어 놓았던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리던 2008년 겨울, 태안의 장길산 세트장. 2007년 가을부터 시작된 촬영은 이미 해를 넘겨 끝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고 스텝들 전원은 몇 달 동안 지속된 고된 촬영과 맹렬한 추위에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다.


특히나 우리 팀은 촬영이 끝나도 다른 스텝들이 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가 많았는데, 촬영이 끝나도 다음 회차 촬영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에 한참 인기가 있던 MBC 사극과 세트장을 공유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팀과 촬영 장소가 겹치면 세팅을 모조리 다 철수했다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까지 자주 벌어졌다.




추운 겨울, 밤이면 기온이 더 뚝 떨어져 그냥 있기도 힘든 야외 세트장에서 추위와 졸음에 싸워가며 기껏 밤늦도록 세팅을 다 해놓으면 아이디어가 너무나도 풍부하신 감독님이 뒤늦게 오셔서 이것저것 수정사항을 마구마구 던지고 가곤 했다.


그 결과 시나리오에 없던 공간은 눈치 없이 부쩍 자주 생겨났고 이미 촬영 전 얘기가 끝났던 공간의 세팅 방향이 현장에서 갑자기 바뀌는 일도 잦았다. 그리하여 불쌍한 우리 팀 감독은 팀원들의 볼멘소리를 종종 들으며 촬영 내내 우리에게 술을 자주 사줘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 속 배경은 한 여름인데 이런저런 상황으로 촬영이 계속 늘어지다 보니 결국 계절은 가을이 되고 또 겨울이 되었다. 그리하여 단풍 시기가 늦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점점 이동하던 영화팀은 제주도까지 가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매 씬마다 자연의 조화를 거스르느라 특수 효과팀과 제작부가 대형 가스통과 장비를 들고 사방의 눈과 얼음을 녹이러 다녀야 했고, 우리 팀은 붉게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파릇파릇한 조화로 죄다 가려야 했다. 비 내리는 씬에서 살수차가 비를 뿌리면 배우들의 젖은 옷이 바로 얼어 움직일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 촬영이 지연되기도 했다. 야속하게도 참으로 춥던 겨울이었다.


촬영은 중반을 넘어가고 스텝들도 고된 스케줄에 슬슬 불만이 쌓여가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현장이 힘들어질수록 스텝들은 점점 더 끈끈해졌고 그 결과 ‘충무로 영화 현장 사상 최다 커플 탄생’이라는 전무후무한 후문을 탄생시켰다. 그야말로 음과 양의 조화요. 사랑이 싹 뜨는 현장이 된 것이다.


그 전설적인 기록은 당시 유명한 영화 잡지에도 기사로 실렸다는데, 그 기록이 지금은 깨졌는지 아직도 유지 중인지는 모르겠다. 비록 내 바람대로 영화인으로 크게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으나 충무로의 그 역사적인 기록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한 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시나리오에 없던 공간이 갑자기 생겨난 바람에 소품팀이 부랴부랴 한가득 소품을 실어왔고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새로이 추가된 공간인 ‘무녀의 집’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야외 세트장의 소담한 한옥 마당에 색색의 종이꽃이 여러 개 달린 대형 꽃상여가 들어오고 무당집 소품들이 줄지어 마당 한가득 놓였다. 대부분의 스텝과 배우들은 세트장 근처 바다에서 짧게 인서트 촬영을 하고 금방 넘어올 예정이었기에 그날, 드넓은 세트장에는 우리 팀 몇몇만이 덩그러니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촬영 준비로 모두가 바삐 움직이던 때, 어느샌가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고 그 눈은 금세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펑펑 내리는 눈 때문인지 옆에 세워두었던 소품팀 탑차 라디오에서 꽤 오래전 노래인 박학기의 '향기로운 추억'이 때맞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생각해 봐요. 눈이 많던 어느 겨울
그대 웃음처럼 온 세상 하얗던
귀 기울여봐요. 지난여름 파도 소리
그대 얘기처럼 가만히 속삭이던

이제 다시 갈 수 없나.
향기롭던 우리의 지난 추억. 그곳으로.  

박학기. 향기로운 추억.



펑펑 내리는 흰 눈, 성황당에 켜진 초들, 마당에 놓여 눈을 맞던 꽃상여와 무당집 소품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향기로운 추억'.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순간으로 기억에 남았다.


유달리 눈이 많이 내리던 그 겨울, 태안 세트장 한가득 쌓인 눈에 발이 시리도록 폭폭 빠지던 그 부드러운 감촉과 차가운 겨울의 냄새. 그리고 나지막이 흘러나왔던 그 노래를 떠올려본다.


그해 겨울 내내 지긋지긋하게 자주 내리던 눈 덕분에 몸은 더 고되었으나 세트장에 하얗게 쌓인 눈을 폭폭 밟으면 가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올랐다.


그 시처럼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우리는 영화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눈이 푹푹 나리고 힘들어도 나타샤와 흰 당나귀처럼 그저 영화가 좋아서 또 현장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어대던 나날들이었다.




다 합치면 30명이 넘는 우리 팀에서 가장 가까웠던 그녀. 우린 피곤하고 지친 현장에서도 언제나 서로를 응원했으며, 밤늦도록 힘들게 촬영준비를 하다가도 세트장 한편에 놓인 평상에 나란히 누워 겨울 하늘의 별을 헤아리기도 했다.


한 번은 둘이 현장 이동 중 커브길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져 자칫하면 큰일 날 뻔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이 조상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할 만큼 둘 다 손 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던 적이 있다.


사극 현장이라 무거운 석탑과 현장 공구들이 가득 실린 큰 차가 제어되지 않고 검은 연기를 뿜어대며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만약 다른 차와 충돌했거나 당황한 내가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차는 전복되었을 것이고 그럼 큰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곳은 사망사고가 많은 ‘사고다발구역’이었다.


사고 수습하고 다시 현장으로 가는 길, 그간 얼마나 힘들었으면 “새끼손가락이라도 하나 부러졌으면 좀 쉬었을 텐데" 왜 이렇게 운전을 잘하냐며 아쉬움에 한숨 쉬며 웃던 그녀가 생각난다.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아마도 어느 정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인생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숱한 날을 영화 현장에서 불태웠던 우리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신기하게도 둘 다 한국을 떠나 현재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나란히 살고 있다. 비록 같은 나라는 아니지만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닿는 옆 나라에 그 시절을 함께 했던 그녀가 있다는 사실은 그 존재만으로도 외로운 타지 생활에 큰 위안이 된다.


곧 만날 날, 그 시절 그때처럼 함께 나란히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헤아리게 되기를. 아마 그녀도 오래전 그 밤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스텝들 사이에서는 태안 장터에서 만 원에 팔던 솜바지가 유행이었는데, 가격에 비해 얼마나 따뜻했던지 나 역시 그 만 원짜리 솜바지를 입고 열심히 현장을 누볐다.


대학 졸업 후 친구들은 직장 생활을 하며 옷도 멋있게 입고 다녔지만 나는 대학도 휴학한 채 옷을 사도 늘 일 할 때 편할 옷을 주로 골랐다. 쉬는 기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나중에 참고가 될까 그곳의 공간들을 사진으로 찍어 저장하고, 영화를 보면서도 늘 인상 깊은 공간들을 따로 메모해 놓았다. 온통 영화 생각만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올 거라 순진하게 믿었다. 그래서 훗날 좋은 작품도 많이 하고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부모님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나를 비참하게만 할 뿐이었다. 고맙게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나를 믿고 끝까지 따라주었지만, 준비하던 영화들은 계속 엎어지기 일쑤였고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운과 명예는 나를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자주 떠나보내야 했다. 어쩌면 내 실력이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촬영 전에 몇 개월을, 길게는 몇 년 이상을 주말이나 휴일 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해도 촬영 직전 영화가 엎어지면 단돈 십원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런 상황이 매우 자주 일어났던 나는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는 황당한 삶을 살았고 촬영이 들어간다 해도 야근과 스트레스, 불규칙적인 스케줄 덕분에 건강 역시 많이 안 좋아졌다.


그러나 영화가 엎어지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난 미련하고 또 바보스럽게도 오랫동안 정성 들여 일한 작업물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영화가 엎어지면 허탈감과 절망, 무력감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생계를 위해 당장 아르바이트를 구해야만 했다. 그런 불안정한 삶을 오래 살다 보니 삶의 질은 점점 바닥을 쳤고 가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해 결국 몸도 마음도 갈 곳하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삶에 깊은 회의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재능이 있어도 우직하게 열심히만 하는 곰 같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곳은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와 비슷한 성향의 동료들은 하나 둘 영화일을 그만두고 떠나기 시작했고, 나 역시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버티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현장에서 가슴이 떨리지 않았고 그곳에 있는 게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내가 있던 팀의 감독은 그 당시 꽤나 잘 나가는 미술 감독이었는데 미술 감독 시절도 그러했지만 추후 연출 감독이 되어서도 국내외 굵직한 영화제에서 제법 큰 상을 수상하며 더더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결국 지 버릇 남 못주고 소싯적 하던 짓을 멈추지 않았던지, 훗날 영광스러운 '미투'의 주인공이 되시어 다시 한번 영화계에 걸출하게 이름을 날렸고 그렇게 영화판에서 사라졌다.


오래전 그가 내게 했던 말 하나가 떠오른다. 

“유명한 미술감독이 되고 싶지? “


나는 순진하게  두 눈을 크게 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더랬다.


“몸매 잘 가꾸고 빚을 내서라도 백화점에 가서 명품 사고 몸에 두르고 연식 오래되더라도 외제차 타고 다녀. 그리고 영화사 다니면서 자주 얼굴 비치고 영화계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남자들을 꼬셔. 그게 비법이야. “


이게 바로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간다던 미술감독인 그가 팀원인 내게 알려준 ‘비법’ 되시겠다. 그 뒤로 나는 동경하던 그를 내 마음에서 지웠고 비로소 그 이상하고 더러운 곳의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러운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만약 그 시절의 나를 마주한다면 뭐라고 얘기를 할까? 그렇게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너무 열심히는 하지 말라고, 남들처럼 적당히 정치질도 좀 하고, 아부도 살살하고, 요령도 좀 피우면서 하라고, 아니면 그까짓 영화 때려치우라고, 어차피 너는 나중에 프랑스에 가게 될 테니까.


그러니 그냥 노닐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하고 싶던 불교 공부 실컷 하고 산과 절에도 맘껏 다니면서, 프랑스어나 좀 공부하라고. 그럼 영화밖에 모르던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믿을까? 그 당시 가까웠던 친구들이 하나둘 유학을 떠날 때마다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았던 그 시절의 나는 어쩌면 너무나 행복해할지도 모르겠다.


팀 내에서도 유학 경험 있는 사람들이 더 유리한 위치에 오르는 걸 보며 나도 유학 가서 공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많다.


그러나 늘 불가능한 현실에 좌절해야 했던 나는 그 당시 유학은 커녕 남들 다 간다는 해외여행 한 번 가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결국 영화를 그만두면서 답답한 한국을 틈만 나면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은 이렇게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다.


어찌하였건 그렇게 영화일을 빛나듯 사랑했고 또 영화인인 것이 늘 자랑스럽던 나였지만, 이젠 한국 영화를 굳이 보지 않는다. 내가 오래전 참여했던 작품이 아직도 넷플릭스에 있지만 그 또한 젼혀 보고 싶지 않다. 아니 어쩌면 다 꼴도 보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맞겠다.


지난 영화 현장에서 극도의 과로와 스트레스로 완치 없는 ‘면역성 질환’도 훈장처럼 얻었다. 뇌수막염이 와서 열이 40도인 상태에서도 현장에 있던 나였다. 현장에서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사고는 사고도 아니었다. 통증이 심해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도 현장에 달려가던 나였다. 그만큼 몸 사리지 않고 그렇게 15년을 가까이 처절하게 붙들고 했으니 적어도 후회는 없다.


그러니 가끔은 그냥 이렇게, 그 시절의 반짝이던 내가, 현장의 공기가, 매일이 멀다 하고 세트장 가득 푹푹 나리던 하얀 눈이 그리고 곁에 있던 반짝이던 이들이 또 반짝이던 내가 오늘처럼 문득 그리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만은 비가 아니라 그 시절 그날들처럼 하늘에서 함박눈이 푹푹 나리면 좋겠다고 부질없는 생각도 한번 해본다. 그래준다면 오래전 그날처럼 내리는 눈을 보며 박학기의 ‘향기로운 추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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